정치사회

세계적 경제불황과 미래사회에 대한 기대...

까칠부 2016. 1. 16. 04:03

딱 지금의 세계경제가 이미 19세기에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자본주의의 모순이 한계에 이르러 붕괴되는 상황 바로 그대로일 것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돈은 넘쳐난다. 당장 중국만 하더라도 지난 수십년간 세계의 공장이자 시장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보이며 세계경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축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열강등조차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되는 미국의 뒤를 잇는 또하나의 슈퍼파워였다. 그런데 그 중국의 경제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자본의 이익을 증가시킨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양의 일을 하더라도 더 많은 생산을 할 수 있고, 그것은 고스란히 자본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노동자의 임금소득은 노동량에 비례하므로 결과적으로 자본이익의 증가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세계적인 석학 피케티와 디턴이 이미 그를 통계적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인 바 있었다. 그러면 늘어난 자본의 이익은 어디로 가겠는가.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도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자본은 끊임없이 새로운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진다. 돈이란 수단이다. 쓰이지 않는 수단이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통장에 잠들어 있는 돈은 그냥 숫자일 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필요한 재화를 사거나, 아니면 자본을 증식하는 수단으로 쓰이거나. 그래서 하다하다 새로운 이익을 추구할 시장으로 신용도가 불량한 대상에게까지 위험한 대출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그 결과가 2008년의 세계적 경제불황이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때 세계의 시장이었던 중국은 스스로 세계의 기업들로부터 기술을 습득하고 성장하여 어느새 세계시장에서 그들과 경쟁하는 위치에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중국의 기업들이 그동안 벌어들인 돈들은 새롭게 생산을 위한 설비에 투자되고, 그만큼 중국이 그동안 세계시장에서 얻은 이익에 비례하여 생산 역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면 그동안 세계의 소비는 그를 감당할 만큼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는가. 소비는 늘지 않는데 생산만 늘어난다. 중국의 내수마저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어느새 성장의 한계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면 다 팔지 못하고 남은 생산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전과 똑같은 시간 동안, 오히려 더 적은 노동력만을 고용하여 더 많은 생산을 한다. 임금으로 지불하는 비용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런데 생산한 제품을 팔기 위해서는 시장의 구성원들이 지갑을 열어야 하는데 바로 그 지갑을 채우고 있는 것이 바로 노동자의 임금소득인 것이다. 임금소득은 갈수록 줄어드는데 생산만 늘어난다. 생산만 늘린다고 더이상 팔리지 않으면 그 자체로 자본의 손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는 그나마 임금이라도 더 줄여서 비용을 줄이거나, 아니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지구상에 땅도 사람도 한정되어 있는데 무한히 그렇게 새로운 이익을 찾아나서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더 싼 임금을 찾아 제 3세계를 뒤지고 다녀봐야 노동자의 임금소득이 충분히 늘어나지 않는다면 손실만을 더 늘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근본으로 돌아가면 된다. 생산성이 두 배로 올랐다. 전과 같은 일을 해도 두 배의 생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전에 비해 절반만 일을 해도 같은 양의 생산이 가능하다. 절반만 일을 시킨다. 같은 임금으로 두 배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하게 한다. 기술의 발달로 인한 생산성의 향상을 자본과 노동자가 함께 나누는 것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고용되어 일을 하고 임금을 받을 수 있으며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그것을 쓸 수 있게 된다. 지금 유럽에서 시도되고 있는 경제실험의 내용이다.


물론 전과 같은 수준의 임금을 지급하며 두 배의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것은 기업에게도 부담이다. 그래서 대신 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전보다 낮게 평균화한다. 그래도 전보다 적은 시간만을 일하니 상대적인 소득은 오른 것이다. 더 많은 세원이 생겼으니 정부는 그 세원으로부터 충분한 세수를 확보하여 - 물론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이익을 누리는 자본으로부터도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들인다 - 노동자들이 전보다 적은 임금으로도 충분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구조를 정비한다. 복지란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닌 시장의 불확실성과 불안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시도인 것이다. 정부의 지출로 대신하는 만큼 노동자는 임금에 대한 필요가 적어지고 소비를 할 수 있는 여력도 늘어난다. 극단적으로 저축이란 필요없이 버는 돈을 모두 자신을 위해 소비할 수 있는 경우도 나타날 수 있다. 그 소비는 곧 기업의 매출이 된다.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느 보다 진일보한 미래사회의 모습인 것이다. 더 적은 노동시간과 더 많은 고용, 그리고 줄어든 임금소득을 대체할 고도의 복지제도. 오로지 노동자는 자신의 모든 임금소득을 시장에서 소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아마 마르크스 역시 자본주의가 붕괴한 미래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관념이었다. 이럴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역설적이게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마르크스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노동자가 주인이 된다는 것은 노동자 자신이 자본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단순히 생산을 위한 수단만이 아닌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주체로써 그 지분을 인정받는다. 충분히 존중받으며 정치적 정책적으로 배려받는다. 기본적인 지출을 정부의 지출로 대신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생산양식이 인간 자신을 주인이 되어 풍요롭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기에는 이미 투표장에서 한 표를 행사하는 유권자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인이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주인인 노동자 자신이 타협해가며 보다 나은 미래를 구상하고 실천해간다.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닐까?


아무튼 결국 지금의 현실이야 말로 자본주의의 한계라 말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이상 생산을 늘려봐야 그 생산을 감당할 시장이 늘어나지 않고 있다. 미국의 셰일혁명이 오히려 세계의 유가를 떨어뜨리며 불황의 원인이 되어가고 있다. 세계의 시장이어야 하는데 이제 제조업까지 부활하며 세계시장에서 공급자로서 경쟁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장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엇으로? 비단 특정한 어떤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는 이미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 있다. 자본주의만이 아닌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이번 총선과 대선이 중요한 이유다. 기자회견한 것을 보니 정부와 여당은 아직도 70년대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업들 역시 기껏해야 90년대에 머물러 있다. 지금은 21세기다. 21세기에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경제민주화도 늦다. 하지만 필요하다. 치열하게 궁리하고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결국 우리들 자신이 무너지고 만다. 기회는 많지 않다.


보다 구조적인 것이다. 구조적인 모순과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마르크스의 직관은 이런 식으로 다시 한 번 가치를 드러낸다. 해결은 지금을 사는 우리들 자신의 몫이다. 멈추면 도태된다. 고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