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 -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뀐다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뀐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타임머신을 꿈꾼다.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슬립을 상상한다. 다만 하루라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단 하루라도 과거의 후회를 다시 바로잡고 싶다. 떠올리기조차 두렵고 싫은 과거의 기억을 보다 기쁘고 즐거운 기억으로 전혀 새롭게 바꾸고 싶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고, 잃었던 것들을 되찾고,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는다. 더 나아진 자신과 더 좋아진 지금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족하게 만들 것이다.
물론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과거는 현재가 되며 새로운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의 지식과 경험 또한 새로운 시간에 휩쓸려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하물며 자신이 직접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단지 목소리만을 무전기를 통해 과거의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있을 뿐이다. 과거의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자신만의 현재가 있고 자신만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지금의 자신과는 상관없는 과거의 누군가의 현실과 사정이 또다른 구속이 되고 한계가 되어 변수들을 만들어낸다. 하기는 그러니 드라마가 성립한다.
과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이것이 사실인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이 사실이 실제인가. 당연히 믿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신하며 반발한다. 분노하며 부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사실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아무리 믿을 수 없고 인정할 수 없어도 당장 자신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엄연한 현실마저 마냥 거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믿을 수 없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차라리 타인이기에 객관적일 수 없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차수현(김혜수 분)은 무심코 자신의 간절한 바람을 박해영(이제훈 분)에게 전하고 만다. 차수현이 그토록 찾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전해질 바람이다.
아직 말단순경이었다. 아무런 권한도 재량도 없이 까마득한 상급자들에게 휘둘려야만 하는 처지였다. 미래로부터 들려오눈 무전따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 아니 말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래로부터 전해진 정보들이 아직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알고 있는 순경 이재한(조진웅 분)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이재한에 의해 잡힌 최초의 용의자가 사망하게 되는 것도,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 또 한 명의 연쇄살인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도, 모두 그의 권한과 재량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현풍역 근처에서 8번째가 되었을 희생자를 구한 것을 제외하고 더이상 누구도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과거의 시간대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끝나고 말 것인가.
하필 9번째 희생자가 젊은 시절 말단순경이던 이재한이 짝사랑하던 동사무소 여직원이었다.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생겨났다. 어떻게든 연쇄살인범으로부터 구해내야 하는 필연적인 동기가 생겨났다. 경찰을 속이고 경찰서를 빠져나간다. 무전기로부터 들려온 목소리를 쫓아 사건이 일어날 장소로 달려간다. 26년 뒤인 2015년에도 과거 미제로 빠졌던 경기남부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가 다시 시작되자 새롭게 같은 수법으로 살해당한 피해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단순히 미제로 분류되었던 과거 사건의 범인을 쫓는 것에서 현재 일어난 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것으로 그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 현대의 첨단 수사기법들이 26년 전 짝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이재한과 함께 새롭게 법인을 쫓기 시작한다.
절묘하다. 26년 전 이재한에게 전해진 박해영의 무전으로 말미암아 미묘하게 사건의 내용이 바뀌어지고 있었다. 원래 8번째였던 희생자가 이재한에게 구해지며 미수에 그친 뒤 대신해서 8번째, 9번째가 되었던 다른 희생자들이 전혀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시신으로 발견되고 있었다. 박해영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사건의 내용이 달라지며 범인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비교대상이 만들어졌다. 차수현이 찾아낸 버스노선이라는 단서도 박해영만이 알고 있는 이전의 사건장소들을 통해 더욱 확실해진다. 만일 이재한이 8번째 희생자를 구한 것을 계기로 범인의 범행패턴이 달라졌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어떤 요인이 범인으로 하여금 살해시간과 장소를 바꾸도록 만든 것인가? 하마트면 경찰에 체포될 뻔한 위기를 겪고서도 오히려 더 서둘러 사람의 통행이 잦은 주택가에서 추가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범인의 행방은 거의 압축되었다. 아직 범인이 누구인가 특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이재한과 차수현이 찾아낸 단서대로 당시 95번 버스를 타고 이동하던 누군가였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이재한과 차수현은 같은 단서를 찾아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때 이재한이 쫓던 범인이 도망치며 버스에 올라탄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버스기사와 안내양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증언하고 있었던 것인가. 연출을 통해 그때 누군가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암시하고 있었다. 어떤 다른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분명 무언가 함정이 숨어있을 것이다. 분명 사실을 말하고 있음에도 진실을 감추는 함정이 되고 말았다. 과연 26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해된 듯 보이는 시신은 같은 범인에 의해 살해된 것일까. 아무런 침입이나 반항의 흔적도 없이 피해자는 살해되어 있었다.
수사팀 각각의 개성과 역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차수현이야 당연히 실력과 경험과 열정을 모두 갖춘 수사팀의 리더다. 아마 리더로서 차수현의 약점은 지금껏 그녀를 붙잡고 있는 어떤 미련이기 쉬울 것이다. 박해영은 프로파일러이자 과거의 이재한과 현재의 차수현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같은 단서를 찾아냈듯 박해영을 통해 그들은 시간을 뛰어넘어 하나의 사건을 해결해간다. 김계철(김원해 분)도 보기와는 달리 그저 무능하고 무기력한 퇴물형사만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경험이 누구도 보지 못했던 단서를 찾도록 만든다. 정헌기(이유준 분)는 더욱 강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 물론 아직 시간은 많다. 이제 겨우 첫사건을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사건의 진실보다 경찰의 책임이다. 이제는 단서조차 희미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의 명예를 지킨다. 전형적이고 노골적인 관료의 족쇄다. 차수현과 미제사건전담팀의 활동을 옭죄고 억압한다. 이재한과 다르게 사건과 더불어 그들이 극복해야 할 현실의 구속이고 한계다. 주인공과 수사팀의 입장에서 오로지 그들의 편에 서서 긴장과 분노를 키운다. 시간에 묻혀 있던 진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가 바뀐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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