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죄악인 이유...

까칠부 2016. 2. 22. 18:13

내가 항상 드는 예가 하나 있다. 바로 새끼고양이다. 어느날 새끼고양이가 앞발로 힘껏 나를 내리쳤다. 그래서 나도 그 보복으로 새끼고양이를 내리친다. 과연 옳은가?


아직 어린 고양이에게는 방어하거나 저항하거나 심지어 도망칠 어떤 능력도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무심한 나의 행동 하나로 인해 고양이는 죽을 수 있다. 어차피 고양이는 괜찮을 거야. 추운 겨울에 보일러도 켜지 않고, 밥도 물도 주지 않은 채 집을 나선다. 학대다. 사람의 아이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여기서 주로 비판하는 대상들, 그나마 반론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마주 욕하며 멱살잡고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오히려 말하는 것이 더 조심스럽고 꺼려지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무어라 한다고 그로 인해 상처입기 전에 마주 상처입히려 달려든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소수자는 다르다. 소수자가 소수자인 이유는 소수자임을 드러내기조차 꺼려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일반이 편들어주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함께 싸워줄 자기편조차 없다. 무심한 말 한 마디가 그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행동들이 그들에게는 폭력이 되고 억압이 될 수 있다. 억지로라도 그들에 대한 배려를 몸에 익혀야 하는 이유다.


사실 나도 자신은 없다. 과연 동성애자가 바로 자신의 옆에 있다면 그때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노력할 것이다. 최소한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자신을 다잡을 것이다.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싫다는 말을 하는 것조차 상처가 될 수 있다. 내가 잘못이라 말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싫다는 말조차 자제해야 한다. 자유는 결코 대칭적일수도 균질적일 수도 없다. 인간은 결코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 더 곤란하고 더 결핍된 곳에 더 많은 것들이 주어져야 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모른다. 본능적 욕망과 감정을 정당화하는 것을 논리라 여긴다. 사실 보수가 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현재와 현실만을 강조한다.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다.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