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필리버스터와 국회의원 - 치열한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한 찬가...

까칠부 2016. 2. 29. 02:18

솔직히 부럽다. 나는 그렇게 못한다. 다섯시간 이상 선 자세로 그것도 쉼없이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용까지 있어야 한다. 내용의 범위 역시 정해져 있다.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글 잘 쓰는 세 가지 방법. 다독, 다서, 다상량.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다상량이다. 평소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 넘치고 넘치다 못해 압축되기 시작할 때 제대로 된 글이 나온다. 내 글이 난잡한 이유다. 나는 글을 쓰는 그 순간에만 생각을 한다.


말을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짧은 몇 마디는 그저 순발력으로 타고난 재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다. 한 시간이 넘어가고 두 시간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야 한다. 바닥이 드러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고민했고, 그래서 얼마나 오랫동안 궁리해 왔는가. 그 넓이와 깊이가 바로 말을 통해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자료들을 가지고 그 길고 오랜 이야기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기는 그런 삶을 살아왔던 이들이었다. 그 가운데 다수가 엄혹하던 시절 육신의 안위마저 돌보지 않고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서 싸우던 이들이다. 고문까지 당했다. 생명의 위협까지 겪었었다. 자신은 물론 주위의 친인이나 지인들마저 고통속에 살아야 했었다. 생각이 없을 수 없다.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만큼 그 내면은 치열하고 뜨겁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그 자체까지 바뀌지는 않는다.


사람은 위기에서 그 진가가 드러난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고단하고 가장 외로울 때 그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에서 더이상 계파따위 상관없이 오로지 국회의원으로서 국민을 위해 단상에 선다. 하나라도 더 진실을 알리고자 육신의 고통을 견뎌가며 한 마디를 이어간다. 전장이다. 그곳은 그들에게 또다른 전장이다. 죽더라도 여기에서 죽겠다. 쓰러지더라도 여기에서 쓰러지겠다. 그런 치열함이 감동적인 연설을 만든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이들마저 귀기울이게 만든다.


사실 뜨악했었다. 별 흥미도 기대도 없었다. 야당에 대한 실망도 실망이려니와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환멸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저들은 저토록 열심히 싸우고 있다. 주류언론 가운데 어디서도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부당한 현실 속에서도 한 가닥 진실과 정의를 믿고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진보란 용기이고 긍정이고 낙천이다.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내일을 믿는다. 가장 화나도록 부러운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단상에서의 그 고통의 시간들이. 나이마저 적지 않다. 첫주자였던 김광진 의원을 제외하고 하나같이 불혹을 넘긴 장년이나 초로의 나이들이다. 그 굳건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는 어쩌면 누구에게 기대어 지금의 자유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이제서야 다시 떠올리고 만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어떤 사실들을.


한때 새누리당의 국회의원 가운데서도 그런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저들과 함께 불가능과 맞서 싸우던 치열한 시절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사료에 맛들인 사자는 결코 짐승을 사냥하지 않는다. 그저 부와 권력만을 노렸다면 굳이 야당에서 어렵게 국회의원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역주의를 깨겠다고 영남에 출마해서 몇 번이고 낙마한 수많은 야당의 정치인들과 아예 호남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여당의 정치인들. 여전히 그들은 치열한 전장에서 살고 있다. 그들에 빚지며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테러방지법'저지에 끝내 실패하더라도 최소한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싸웠었다. 국민을 등뒤에 두고 물러섬없이 싸우고 있었다. 패한 것은 저들의 탓이 아니다. 저들을 믿지 못한 국민의 탓이다.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그러나 단 한 가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저들은 아직도 싸우는 전사다.


앞으로 열하루. 참 긴 시간이다. 과연 그 시간동안 야당의 정치인들은 버틸 수 있을까. 견딜 수 있을까. 아무래도 좋다. 너무 많은 빚을 졌다. 처음으로 당원가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진심이 얼어붙었던 마음을 움직인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냉소가 아닌 진심어린 말과 행동이다. 알면서도.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