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여당에 칭찬받고 싶은 야당...

까칠부 2016. 2. 29. 18:29

너무 오래 많이 져 온 때문일까? 아예 패배가 내면화되고 말았다. 굴종과 비굴이 아예 일상이 되어 버렸다. 여당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여당 지지자들은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여당 성향의 주류언론은 무엇이라 보도할 것인가. 그래서 여당 마음에 들면 그들은 야당을 위해 표를 주고 우호적인 보도를 할 것인가.


거의 유일한 기회다. 친여성향의 언론을 통하지 않고도 야당 국회의원들의 말들을 국민들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다. 야당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와 의미, 무엇보다 존재를 국민들에게 직접 알릴 수 있다. 하지만 여당이 불편해 할 것이기에. 그래서 여당의 집중공격이 이루어질 것이기에. 여당 지지자들이 싫어할 것이기에. 그러므로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한다. 참 착하다.


이래서 내가 객관식을 싫어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답으로 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출제자가 무엇을 답으로 의도했는가만을 고민한다. 내가 없다. 나 자신이 없다. 항상 문제를 낸 누군가의 눈치만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 칭찬받는다. 그래야 착하고 성실하고 바르다고 칭찬받을 수 있다. 칭찬받기 위해 정치를 한다. 칭찬받기 위해 심지어 정치적 선택을 한다.


누군가로부터는 욕을 먹어야 한다. 아예 쌍욕을 들어도 좋다. 옳다고 여기면 밀어붙인다. 승부를 걸어야 한다. 적이 가장 불편하게 가장 피로하게 여기는 곳에서 승부를 걸어야만 한다. 그만둔다고 유리할 것은 없다. 기껏해야 지금까지대로 현상유지나 한다. 그 현상유지가 무엇인가.


지난 2007년 대선에서 유시민이 했던 말이 당시도 적극 동의하고 있었다. 지려면 제대로 져야 한다. 어설프게 져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확실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정확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최악을 피하느라 정작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진짜 최악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서히 말라간다. 그동안 야당이 보여 온 모습이었다.


마지막까지 간다.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죽거나 혹은 살거나. 여기서 승부를 보지 못하면 야당의 미래는 뻔하다. 여당성향의 종편의 눈치나 보면서, 여당이 무슨 말을 하나 거기에 신경쓰면서, 여당 지지자들의 입맛에 맞게 자신을 다스리면서, 족쇄가 채워진다. 그것이 야당인가. 그런 야당에서 무슨 희망을 찾을 것인가.


일부 야당지지자들의 패배주의적 사고에 한심함을 넘어 환멸까지 느낀다. 지고 싶지 않다. 이보다 더 크게 지고 싶지 않다. 야단맞고 싶지 않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그런 착한 야당이 있었다. 군사독재시절 권력의 칭찬과 사랑을 받던 야당이 있었다. 할 말이 아니다. 패배는 전염된다. 지독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