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후예 - 유시진의 전장에서 "함께 싸워줘서 고마웠어요"
어째서 두 사람의 사이가 이토록 쉽게 풀리지 않는지 얼핏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강모연(송혜교 분)은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인간으로서도, 그리고 의사로서도. 유시진(송중기 분)이 없는 곳에서는 전혀 거리낌없이 환자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고, 환자를 위해 대로 무모한 선택도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정작 유시진 앞에서 그녀는 약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만다.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편한 상대가 있으니까.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니까. 그에 반해 유시진은 너무나 단호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의사였다. 강모연은 의사였다. 의사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만 했다. 다그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기다려주었었다. 짐짓 험한 말로 부담을 덜어주기도 했었다. 당신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의사인 당신 강모연이 필요하다. 여자가 되어 있던 강모연에게서 의사 강모연을 억지로 끌어낸다. 날이 저물어 막사로 돌아갔을 때 강모연이 의사로서 유시진에게 다가갔던 이유였다.
함께한다는 것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던 강모연에게 함께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나눈다는 것이었다. 서로 기대고 위로받으며 힘든 일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삶과 죽음이 오가는 전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유시진에게 함께한다는 것은 함께 싸워간다는 뜻이었다. 서로에게 옆과 뒤를 맡기고 오로지 앞만 보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차라리 강모연보다 서대영(진구 분)과 더 오랜 연인처럼 보인다. 그것은 강모연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함께 싸워줘서 고마웠어요."
바로 그런 뜻이었다. 서로 기대지 않고 위로하지 않으며 군인으로 의사로 같은 전장에서 함께 싸웠었다. 사람을 살리는 전장에서 전우로서 함께 어렵고 힘든 일들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유시진은 강모연에게 미뤄두었던 위로의 말을 건넨다. 아무일도 없을 때 한가로운 일상으로 돌아와서야 두 사람은 다시 남자와 여자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을 알기에 강모연 역시 의사로서 유시진을 치료하면서 다시 여자인 자신으로 돌아와 유시진과 대화를 나눈다. 마치 익숙한 친구처럼 설레임도 불안함도 없는 넉넉한 시간이 흘러간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누구도 대신할 사람이 없다. 자신 역시 의사인 강모연을 대신하지 못한다. 당신이어야 한다. 당신이어야만 한다. 의사인 자신을 깨닫는다. 마침내 결정하고 난 뒤 사람을 살리고 죽는 모습은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의사로서 사람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모습만이 뒤로 이어진다. 유시진의 배려였고 강모연의 이해였다. 그만큼 서로 살아온 시간들이 달랐고, 이해한 만틈 조금은 서로의 거리도 좁힐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하루만큼 그들은 가까워진 거리를 즐긴다.
과연 이 드라마가 가지는 또 하나 미덕이다. 디테일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허술하지만 그렇다고 괜한 고집으로 무리하는 법이 없다. 한 마디로 허세나 오기를 부리지 않는다. 그냥 드라마를 위해 필요하다 여기기에 집어넣은 것 뿐이다. 당장 눈으로 보기에 즐겁고 이야기도 재미있어진다. 인물들에게도 더 많은 역할과 활약이 주어진다. 단지 그것 뿐이다. 더이상 필요없어진 군더더기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더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딱 거기까지만 고민없이 즐길 수 있다. 그냥 그런 일들이 있었고 거기에서 인물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활약을 보였구나. 그래서 이후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전장에서 서대영(진구 분)과 윤명주(김지원 분)도 다시 만났다. 서대영의 사고소식에 충격을 받았을 것임에도 윤명주는 오로지 수술에만 집중하려 한다. 부대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윤명주는 서대영을 보고 있지 않았었다. 유시진과 강모연이 그랬던 것처럼 부대로 돌아와 일과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뒤에야 남자와 여자로서 마주선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걱정과 그리움이 원망과 함께 봇물처럼 터져나온다. 생각하기도 싫은 만일의 상황이 벌어졌다면 후회조차 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었다. 두려움이 남자 서대영으로 하여금 애써 묻어두고 있던 용기마저 일깨우도록 만들었다. 그들의 포옹은 뜨겁다.
한 편으로 의외였다.
"군인인 나한테 국민의 목숨보다 우선하라고 국가가 준 임무는 없으니까!"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도록 통렬한 한 마디였다. 디테일을 무시하며 보는 달달한 로맨스판타지였을 텐데 그대로 현실을 꿰뚫고 있었다. 애국심이란 단지 개인의 이기심을 위한 값싼 수사로 전락한다. 그것도 범죄를 저질러 얻은 부정한 이익을 지키려는 타락한 욕심을 위해서였다. 당장 한 시가 급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동에서 고작 영양제 한 번 맞겠다고 자신의 신분을 앞세우는 모습에서 어떤 친숙함마저 느낀다. 애국심이란 악덕한 자의 미덕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과연 누가 진심으로 애국을 말하고 애국을 실천하는가. 한 편의 우화였다. 너무 적나라하고 신랄하다. 단지 군인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우려할 누군가를 위한 일침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를 소유해가는 과정이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해란 영원히 불가능하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간다. 그만큼 요구할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다. 다가갈 수 있다. 전장은 유시진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강모연은 유시진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한 편으로 더 불안하기도 하다. 그곳에서 보았던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묻는 유시진의 말투가 무척 조심스럽다. 강모연도 아직 자신을 다 알지 못한다. 낯설면서 익숙한 시간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기 시작한다.
과연 그 사이 일주일이 지났음을 깨닫는다. 일주일이 이렇게 짧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된다. 하지만 이틀은 그보다 더 짧다. 시간이 빠르다. 작가와 제작진의 의도대로 필요한 것들만 보고 즐기며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간다. 사랑하고 사랑한다. 살아간다. 다른 것은 없다. 말 그대로 순수다. 있을 리 없는 그 투명함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름답다.x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