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이 나르샤 - 정도전과 세종, 인간과 역사에 대한 희망과 낙관
사실 필자의 경우 이른바 '퓨전사극'이라 불리우는 일련의 장르드라마들에 대해 그다지 좋게 보지 않는 편이다. 현재의 치밀함으로 도망쳐 다른 시대의 역사에 숨고, 역사의 엄밀함을 피하며 현재의 감성을 앞세운다. 시대적 고증도 일상의 디테일도 무엇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단지 작가의 망상의 산물이다. 차라리 이름만 빌렸을 뿐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여기는 쪽이 더 정신건강에 이롭다. 실제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필자의 선입견을 산산이 부숴버리는 작품들을 한 편으로 곧잘 만나게 된다. 그 시대여야 한다. 그 사람들이어야 한다. 역사가 배경이어야 하는 필연성이다. 그러면서도 역사와는 달라야 하는 당위다. 설득당하고 만다. 어쩌면 그 시대 그런 사람들이 실제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밖에서 실제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역사란 단지 지난 시간의 기록이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모두와 함께 공존하는 실재다. 왜곡이 아니라 응용이다.
신진사대부로서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당대의 권신 이인임의 밑으로 들어가 부패와 전횡을 일삼던 염흥방의 변신을 홍인방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한편으로 불의한 시대에 맞서며 젊음을 불살랐던 이들이 어느새 기득권의 편에서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었다. 최영의 요동정벌계획이 모두에게 알려지는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첩보물을 보는 것 같았고, 사료에도 고작 몇 줄 기록이 전부인 조민수의 실각까지는 피비린내나는 혈투가 한바탕 지나가고 있었다. 역사의 큰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 역사만으로는 불가능한 자신만의 재미와 의미를 그 안에 적절히 섞어낸다. 역사를 이야기하며 드라마를 이야기한다. 내내 감탄한 이유였다. 과연 이런것이 퓨전-정확히 가상역사드라마로구나. 어떤 정통역사드라마보다도 더 역사에 해박하고 적확했다.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에서 작가는 수많은 희생 위에 쌓아올려지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훈민정음해례를 전하며 소이가 죽었고, 다시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지키며 무휼과 강채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제 프리퀄인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서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인간과 역사의 연속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생기기는 분명 아버지인 이방원(유아인 분)을 꼭 닮았다. 그렇지만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그보다는 정도전(김명민 분)과 분이(신세경 분)를 더 닮아 있었다. 정도전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분이도 아버지를 따라 무영도에 갔다가 처음 보았을 뿐이었다. 누구나 욕망을 가지기 때문이었다. 탐욕하는 욕망도 욕망이지만 옳고자 하는 욕망도 결국 욕망이었다. 사람이기에 누구나 욕망을 갖는다면 사람이기에 누구나 이상 또한 가지게 된다. 같은 욕망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같은 이상을 갖는 사람도 있다. 정도전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도 정도전이 살아서 미처 찾지 못했던 마지막 조각을 찾아내고 끝내 완성한다.
정도전 한 사람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방원 한 사람만의 나라도 아니었다. 이성계는 틀렸다. 모두가 함께 세운 나라였다.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나라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며 그 과정에서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었다.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이 만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그들은 모두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 그것을 지키려 했던 것이었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정도전은 조금의 원망도 실망도 내비치지 않았었다. 역사에 대한 낙관이다. 인간에 대한 낙관이다. 어떻게든 내일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 의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은 열릴 것이다. 역사란 그에 대한 기록이다. 전혀 모르는 곳에서도 마치 퍼즐의 조각처럼 모두가 인간의 역사르 만들어간다.
과연 백성이었다. 이방원이 말한 그대로였다. 정확히는 무휼(윤균상 분)이 아닌 할머니 묘상(서이숙 분)이었다. 대단한 대의같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많은 것을 알지도 못하고 남달리 넓게 깊이 생각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백성으로서 무휼이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바로 눈앞의 일들만을 보려 할 뿐이었다. 무휼이 공을 세워 높은 벼슬을 하는 것보다 당장 마음 편하기를 바란다. 무휼이 높은 관직을 얻고 부와 권세를 누리는 것보다 당장 얼굴이 익고 마음이 익은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해치지 않으니 남도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 내가 죄짓지 않으니 남도 자신에게 죄짓지 않는다. 아무일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런 묘상에게 사람을 죽여가며 이루어야 하는 이방원의 대의란 자신의 평범한 일상마저 망가뜨리는 폭거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익숙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나가고 있었다.
역사상 많은 어질고 현명한 이들이 오로지 백성을 앞세우며 백성을 이롭게 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백성들 역시 그런 것을 바라고 저 높은 곳에 있는 대단한 이들을 일방적인 감정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었다. 훌륭한 위정자는 백성에게 이끌리고, 백성들 역시 훌륭한 위정자에게 이끌린다. 하지만 결국 위정자는 위정자였다. 백성은 백성이었다. 누구보다 백성들 자신이 그것을 잘 알았다.
차라리 위정자는 착각을 한다. 자기가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고 있다. 백성이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백성은 안다. 위정자의 단순한 변심에도 백성인 자신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 한 발의 거리를 쉽게 허락할 생각이 없다. 원한다면 따라주기는 하겠지만 언제든 도망칠 준비부터 하고 있다. 그리워하지만 닿을 수 없고, 만나고자 하지만 잡을 수 없다. 과연 그런 절묘한 긴장감이 역시 이방원과 분이의 사이를 닮아 있었다.
하기는 그렇기 때문에 위정자는 백성을 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허구의 백성이었다. 가상의 백성이었다. 모르기에 궁금해하고, 만날 수 없기에 그리워한다. 그래서 백성이란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이방원이 아무리 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도 분이는 그 마음만으로 충분치 못하다. 어딘가 멀리 알지 못하는 곳에 있을 분이를 위해서. 자신의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갈 분이를 웃게 하기 위해서. 심지어 분이를 위해 대마도정벌까지 지시한다.
그래서 그런 상상까지 해본다. 처음부터 분이란 인물은 없었다. 단지 정도전과 뜻을 같이하던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백성을 '분이'라 부르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먼저 마음주고, 그런 자신에게 마음을 내주고, 그러다가 멀어지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돌며, 어느 순간 실망하여 영엉 사라지고 만. 그러나 여전히 자신은 분이를 사랑해야만 한다. 분이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더이상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자기만 불쌍하다. 자기만 괴롭다.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반드시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었다.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 외로운 것은 왕이란 결코 혼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이란 곧 나라다. 왕이 곧 백성이다. 왕이 나라안의 모든 것이다. 왕이란 누군가의 것이어서는 안된다. 왕 자신의 것이어서도 안된다. 하물며 왕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나누려 해서는 결코 안된다. 많은 왕들이 실패한 것이었다.
외로움에 못이겨서. 무력감에 못이겨서. 권력을 나누고 그 나뉘어진 권력에 의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강해질 수 있는 이유다. 처음 분이와 무휼을 떠나보내기로 했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 지켜야 할 이들이 생겼다. 웃게 해주어야 할 이들이 생겼다. 다시 만나야 하는 이들이 생겼다. 그 무게가 그를 견디게 한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오랜 시간이 지나 할머니가 된 분이가 죽고 이방원과 분이가 다시 만나게 되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만났다.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죽기 위한 싸움이었다. 죽을 자리를 찾으려 한 것이었다. 스스로 죽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도 살아남은 자신이 목숨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핑계를 만들었다. 죽은 사람을 위한 복수를 한다. 어쩌면 척사광(한예리 분)이 이방지(변요한 분)와 무휼의 협공에 목숨을 잃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을 살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더 강해지기도 하지만 더 약해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죽일 수는 있지만 자신을 지킬 수는 없다. 승부는 빠르게 결정난다. 역시나 최고수들의 싸움답게 척사광, 이방지, 무휼 세 사람의 싸움은 단연 압도적이다. 서로 다른 개성의 칼놀림이 화려하지만 치열한 몸놀림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다. 차라리 죽음이 도피다. 죽음이야 말로 평안이다. 자신을 죽이러 와달라. 이방지는 무휼에게 자신의 마지막 소망을 맡긴다. 안타깝게도 전작 '뿌리깊은 나무'로 인해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말았다. 그래도 죽기 전 그는 살아야 한다 말하고 있었다.
이방지와 분이의 어머니 연향은 모든 기반을 잃고 중국 남경으로 떠난다. 연향이 남긴 밀명에 의해 비국사의 주지 적룡(한상진 분)은 보부상의 조직을 만든다. 역사는 이어진다. 하륜(조희봉 분) 역시 무명의 조직원으로 육산선생(안석환 분)과 길선미가 말하던 과거 무명의 내부항쟁 당시 신분을 세탁하고 탈주한 인물이었다. 하륜이 뒤를 봐주고 적룡은 보부상의 조직을 만들어 밀본이 그랬듯 무명의 명령을 기다린다. 욕망이 끝을 보여준다. 사랑해서 속이고, 미워해서 속인다. 욕심으로 속이고, 원한으로 또 속인다. 무명을 끝장낸 것은 이방원의 권력이 아니었다. 무명이 가지고 있던 욕망 그 자체였다. 무명은 다시 긴 세월을 기다리려 한다.
한 편으로 허탈하기까지 하다. 무려 50회였다. 한 주에 2회씩 25주, 6개월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긴 시간동안 한 주의 시작을 '육룡이 나르샤'와 함께 했었다. 마치 그들이 진짜 이방원이고 분이이고 이방지인 듯 그렇게 함께 해 온 시간들이었다. 실재했던 역사였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실재했던 역사 속에 실재했던 이들로 그들은 살아 있었다. 치밀한 대본과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가 있었다. 모두가 떠나고 난 허무마저 소중하다.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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