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감수성...
원래 언제어디서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대개 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중세의 농노들도 그랬고, 아메리카의 흑인노예들이 그랬으며, 일제강점기 식민지의 조선인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말고 시키는대로만 하면 무슨 문제겠는가. 저번 테러방지법과 관련해서 지지자들이 하던 말 그대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별일없이 살아간다.
그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깨닫고 행동에 옮기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했으니 당연히 징벌이 뒤따랐다.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으니 억압과 구속이 가해졌다. 그래서 더욱 저항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사람들은 항상 소수였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런 소수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여전히 평범한 일상을 누리며 살았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이룬 부와 명예는 자신이 옳았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서로 다른 과거의 시간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어땠을까?
새누리당의 개헌선저지를 절박하게 바라는 다수의 야권지지자들과 그것을 오히려 시큰둥하게 조롱하는 이른바 중도지지층의 입장이 서로 다른 이유다. 과거의 군사독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억압당하던 시대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겨우 손에 넣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얼마나 소중히 간절히 여기고 있는가. 테러방지법에 대해서조차 양비론을 펼 수 있는 것이 같은 야권으로 분류되고 있는 두 지지층의 극단적 차이인 것이다. 그 시대 부러움없이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야권이라 분류하기 어려운 이유다. 새누리당의 존재에 대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한 경험적 본능적 공포에 대한 이해가 너무 다르다. 새누리당이 집권을 하든, 압도적 다수가 되어 개헌을 하든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다. 심지어 지지하는 정당이 있고 정치인이 있어도 때로 전략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야권인가. 오래전부터 말했었다. 안철수는 야권이 아니다.
대선을 위해 총선을 버린다. 대선을 위해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압도적 다수의석을 오히려 돕는다. 더민주를 망하게 함으로써 확고한 제 3당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확고한 제 3당의 대표로써 대선단일화를 주장하며 차기 대권을 노린다. 김대중으로부터 배운 모양이다만 그때문에 김대중도 대선만 무려 4수를 해야 했었다. 깜도 안되는게 바람만 잔뜩 들었다.
버려야 한다. 연대는 정의당하고만 한다. 국민의당은 야권이 아니다. 속시원히 선언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랬다가는 진짜 새누리당 좋은 일 시킬테니 그러지도 못하는 것이 야권의 딜레마다. 국민의당은 야권을 욕할 수 있어도 야권은 국민의당에 입바른 소리 하기도 조심스럽다. 간절함의 차이이고 절박함의 차이이고 그래서 볼모잡히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싫었다. 그 쓰레기는. 이름도 말하기 싫다.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