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또 오해영 - 그러니까 처음부터 좋아한 거야!

까칠부 2016. 5. 17. 06:08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가 인연이고 운명인 것 같다. 숨을 쉬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심지어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일들마저도. 그러므로 자신들은 처음부터 사랑한 것이었다. 처음 이전부터 사랑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운명은 필연이다.


예지가 아닌 기시감이다. 막연한 환각이 특정한 대상을 만나며 구체적인 이미지로 바뀐다.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여기게 되었다. 그냥오해영(서현진 분)의 고백을 들으며 확신을 갖게 된다. 그냥오해영이 그런 것처럼 박도경(에릭 분) 역시 그냥오해영을 보며 운명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자체가 마음속에 이미 그녀의 존재가 깊숙이 자리잡았다는 뜻이 된다. 억지로 밀어내야 할 정도로 이미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었다.


어차피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애써 그녀와의 사이에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 그냥오해영은 솔직하게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그 감정을 일부러 타자화시켜 지켜보도록 만들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다. 그녀를 향해 느끼는 감정 역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를 보는 것은 자신이었고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 역시 자신의 것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발악이다. 고집이다. 하지만 결굴 그녀가 자신을 향해 뛰어왔을 때 그는 주저없이 그녀를 받아 안는다. 웃고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며.


하기는 열등감이란 원래 마음에 새겨진 상처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가 불쑥불쑥 아무때고 발작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예상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길 위에서 갑작스런 발작에 고통스러워하는 예쁜오해영(전혜빈 분)처럼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 해묵은 상처의 고통이 자신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아직 날선 말들을 쏟아낼 대상이 남아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동안 혼자 견뎌야 했던 고통들이 자신을 비루하게 비겁하게 만든다. 잔뜩 움츠러든 자신의 안으로 파고드는 것은 자신이 곧추세운 가시들이다. 자기가 자기를 상처입히여 열등감은 더욱 깊이 영혼에 새겨진다. 그냥오해영이 감히 또다른 오해영에게 싫어한다 말할 수 없는 이유다.


먼저 다가와서 살갑게 말을 건네는 자체마저 상처가 된다. 거리낌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아무렇지 않게 자기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다. 자기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억지로 끌려가며 그녀와의 사이에 우열을 확인한다. 하필 같은 색 스카프를 매고 회사에 출근했다. 자연스럽게 그녀와 비교당한다. 그나마 자신에 우호적인 같은 부서 직원들마저 자신의 패배를 말한다. 비교되어야 한다. 심지어 자신마저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고 있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 한 마디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견뎌야 했을까? 하지만 그 순간에마저 그녀는 끊임없이 의식하며 자신의 사고와 행동마저 구속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박도경이 예쁜오해영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방아쇠가 되었다. 박도경에게서도 자신은 다른 오해영과 비교되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오해영과 자신과의 차이를 박도경 역시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못나고 한심한지도. 얼마나 비겁하고 비굴한가 하는 것도. 그것이 싫다. 참을 수 없이 두렵다. 그래서 지레 밀어낸다. 자기가 먼저 미움받으려 한다. 하지만 결국 상처입은 것은 오해영 자신이었다. 박도경 앞에서 그런 자신으로 있어서는 안되었다. 후회는 항상 늦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모호하던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은 이미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박도경을 사랑하고 있었다. 운명이었다.


억지로 뻣뻣이 고개를 치켜든 모습이 차라리 애처로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는 것이 안쓰럽게만 여겨졌다. 물러설 곳이 없다. 한 걸음만 물러서도 바로 깎아지른 벼랑이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버려왔다. 남은 것들이 얼마 없다. 그나마도 알량한 것들이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도 안다. 하지만 남은 것이 없으니 여기서 더 포기해봐야 수치스런 알몸을 내보일 뿐이다. 그녀의 전쟁이었다. 온통 적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그녀는 살아남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사랑받으며 자랐다. 모두로부터 인정받으며 살아왔다. 행동에 그늘이 없다. 목소리와 표정에 그림자가 없다. 자신으로 인해 또다른 오해영이 느끼게 될 감정에 대해 전혀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금은 무섭다. 아니면 그냥오해영과 마찬가지로 자기 일만 생각하는 것으로도 버거운 상황인지 모른다. 자신의 말을 또다른 오해영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전혀 고려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도 박도경이 아직은 미움받을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 반전이다. 아니 조금은 예상했었는지 모른다. 예쁜오해영이 결혼식날 박도경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그만한 중대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기하려 한다. 이번에도 역시 한 발 뒤로 물러서려 한다. 예쁜오해영과 자신은 다르다. 서로 속한 세계가 다르다. 박도경은 예쁜오해영과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기할 수 없다. 양보할 수도 없다. 필사적이 된다. 필사적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가지는 것을 뜻한다. 진짜 운명이다. 결혼직전 헤어진 한태진(이재윤 분)마저 단지 자신의 열등감을 치유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그녀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기와 다른 세계에 속해있던 특별한 사람이다. 마지막 박도경의 사무실 유리를 깨며 나타난 모습이 섬뜩하기조차 하다.


오해영의 전쟁이었다. 모두가 적이었다. 모두가 적인 가운데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무너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버티고 서 있었다. 울며 박도경을 부르고 있었다. 박도경의 고백이 공교롭다. 또다른 오해영의 병이 드러난다. 복잡하다. 사람이란 원래 복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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