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역 살인 - 혐오범죄와 사회적 책임에 대해...
누군가 자기가 사기를 당했다며 주위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
"여자는 믿을 게 못돼!"
일단 여자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여자에게만 사기를 당한 것인가.
당장 글을 쓰는 자신만 하더라도 남성이라는 성별이 자신을 정의하는 정체성의 전부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서울에서 태어나서, 경기도에서 살고 있으며, 본적은 강원도, 본관은 경주다. 혹은 나이이기도 하고, 혹은 종교이기도 하며, 다녔던 학교나, 자신의 최종학력이나, 어쩌면 나라밖으로 나가면 피부색이 자신을 정의하는 한 요소로 쓰이게 될 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 모두가 자신을 가리키는 정체인 것이다. 여자인 것은 알았는데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일까?
특정한 대상에 대한 혐오나 증오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 마주쳤을 때 상대에 대해 알기 위해 세세한 부분까지 종합적으로 살피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가. 태어난 곳은 어디이고, 지금까지 살았던 곳은 어디이며, 주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그런데 유독 그 가운데 한 가지 특징에 대해서만 특정하여 한 가지 인상을 가지게 된다. 여자니까. 혹은 흑인이니까. 혹은 유대인이니까. 이교도니까. 호남사람이니까. 그렇다면 그 인상은 어디서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겠는가.
실제 사기를 친 것은 대구에 사는 기독교를 믿는 흑인 유대인 여성이었다. 그러나 사기를 당한 당사자가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여자라는 사실 한 가지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수많은 특징 가운데 여성이라는 성별 하나만을 특정하여 인식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사회적 경험이다. 인간의 의식은 대부분 개인의 체험을 통해 후천적으로 형성된다. 지금이야 너무나 당연하게 맛있다 여기며 먹고 있지만 과연 내가 한국이 아닌 러시아에서 태어났어도 김치가 맛있게 여겨졌을 것인가. 수많은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반갑고 싫은 것들에 대한 판단 역시 후천적 경험에 의지한다.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강한 인상이 특정한 사건에서 특정한 개인에 대한 특정한 일면에만 주목하게 한다.
사실 대부분의 차별은 그래서 근거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실제 많은 유대인들은 탐욕스러웠고 미국의 흑인들 가운데 범죄발생빈도도 매우 높다. 하지만 그래야만 했던 배경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고 사정이 있었다. 더구나 모든 사람이 직접 경험해서 그같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유대인이나 흑인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마저 그같은 인식을 공유한다. 그래서 사회적 체험이다. 백인사회가 공유하는 흑인에 대한 체험이 흑인에 대한 인상을 결정한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예비범죄자로 간주하며 경계하게끔 만든다.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흑인소년이 백주대낮에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 경찰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자는 거짓말을 잘한다. 여자는 믿을 수 없는 존재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고 흑인이고 유대인이었지만 그 사람은 여자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 되는 것이다. 흑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고, 유대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사회적 경험은 재생산되며 사실을 넘어 진실로 확정된다. 자신의 경험은 사실의 확인이다. 이를테면 여성운전자들에 대한 조롱의 근거로 쓰이는 '김여사'동영상'이 그런 한 예가 될 것이다. 여성운전자에 대한 편견이 있고, 그 편견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있다. 그것을 공유하며 '김여사'의 이미지를 여성 전체에 확장시킨다. 잘못된 운전습관을 가진 여성운전자는 그 강력한 증거다. 다시 공유하며 비웃고 확인한다. 여성운전자는 그렇게 사회적으로 단정된다.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한다. 당연히 화가 난다. 억울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기가 여자들이 보기에 한참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노력한다. 어울리는 남자가 되기 위해. 자격을 갖춘 남자가 되기 위해. 수컷의 본능이다. 그런데 그런 다른 남자들과 경쟁하여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보다 차라리 여자들을 미워하고 원망하며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고 만다. 어느 정도 처음부터 그런 성향이 있었더라도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그만한 확신이 필요하다. 그 확신을 과연 누가 무엇을 통해 제공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여자들이 나쁘기 때문이다. 뜻밖이랄 것도 없이 그와 관련된 헛소리들을 인터넷을 하며 질리도록 보아 온 바 있었다.
선진국에서 혐오나 증오와 관련한 범죄자 발생하면 사회전체의 책임으로 여기고 반성의 계기로 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판단에 있어 개인이 차지하는 범위는 그다지 크지 않다. 오히려 사회적 관계와 체험이 개인의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도록 부추긴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그같은 확신을 가지게 만드는 근거와 논리들이 있었다. 혼자만의 망상이 그런 식으로 구체화되며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진다. 여성의 지위가 낮은 사회에서 성폭행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이유도 같은 것이다. 여성을 단지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는 문화나 인식이 성범죄에 대한 죄책감을 희석시킨다. 이것은 남자의 당연한 권리다.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의 잘못이다. 개인의 일탈에도 사회의 책임은 분명히 상당한 비중으로 존재한다.
단지 개인의 일탈이다. 범인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하필 그 문제가 어째서 여성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이 범인으로 하여금 그같은 극단을 선택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래서 보수와 진보가 나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범인 자신에게 있다. 그럼에도 범인의 행동에는 사회적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가 피해자에게 미안해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남성들이 피해여성에게 죄스러워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반발하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 개인의 일탈이다. 그러나 사회의 책임이다.
차라리 남자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일어난 범죄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여자만을 타겟으로 일어난 범죄인 까닭이다. 묻지마가 아니다. 표적범죄다. 집요하게 기다리며 계획하여 일어난 범죄다. 흑인이기에 살해당한 가족에게 차라리 백인으로 태어나기를 바란다. 당연한 사람의 마음이다. 어쩌면 백인으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억울하게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사회적 범죄다. 누구라도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할 수 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두려움에 떨며 조심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냥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저 일부 여성주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을 덮고 싶은 것이다. 단지 범인 개인이 잘못한 것이다. 자신들을 비난하는 저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 자기들의 차별과 혐오는 정당하며 근거와 논리도 확실하다. 논란이 불거지는 이유다. 무의식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결국 책임은 여성을 비난하며 열등감을 해소하던 여혐의 남성들에 있다는 사실을. 바로 자신이 그런 부류의 하나라는 사실도. 그러나 인정할 수 없기에 고집을 부린다. 그놈만 잘못한 것이다. 괜히 남자들에 책임을 묻는 여자들이 더 문제다. 성대결로 간다면 남자들은 자기 편이다.
원래 인터넷에 기생하는 인간들은 텍스트로 사고한다. 그것도 그리 길지도 정교하지도 않은 텍스트다. 인터넷창을 내리면 사라지는 휘봘성 텍스트다. 솔직하기는 하다. 논란같지도 않은 논란을 본다. 피해자를 추모하기보다 책임을 돌리기에 급급하다. 가해자는 남자가 아니다. 남자들은 자기 편이다.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