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스 - 홍지홍의 집요한 설득 '내가 대신 죽여줄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못해주는 무력감이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비참하다. 자신의 존재와 존엄에 대해서마저 회의하게 된다. 간절한 만큼 더 미안하고, 죄스러운 만큼 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차라리 자신이 아니었다면. 자신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어째서 하필 자신이었던 것일까.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다.
그나마 낫다. 홍지홍(김래원 분)이 굳이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유혜정(박신혜 분)을 설득해서 멈춰세우려 한 이유였다. 지금이 딱 좋다. 원망할 대상이 있고 원망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마음껏 원망하면 된다. 마음껏 탓을 돌리면 된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혹한 현실의 벽과 마주했을 때 결국 갈 곳을 잃은 원망과 미움은 모두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된다. 잘못한 것은 상대인데 오히려 잘못을 제대로 묻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치 자신이 죄인처럼 스스로 할퀴고 물어뜯어 상처입히고 만다. 그런다고 새삼 상대가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도 아닌 그저 자신만 해칠 뿐인 자해에 지나지 않는다.
홍지홍 자신이 직접 겪었던 과정이기도 했다. 홍지홍이 유혜정에게 새삼 사고로 죽은 자신의 친부모 이야기를 꺼냈던 이유이기도 했다. 억울한 친부모의 죽음에 세상을 분노하고 원망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부딪힌 결과 돌아온 것은 동급생들의 결명 아래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자신이었다. 그마저도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복수심을 더욱 단단하고 날카롭게 다지고 벼리는 계기로 삼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과연 자신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때의 그 복수가 지금 이루어져 있을 것인가. 하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결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전혀 주눅들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한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달리 행동을 했었더라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먼 미래의 일까지 모두 알 수는 없다. 보이는 만큼만 보고 들리는 만큼만 듣는다. 아는 만큼만 생각하고 생각이 미치는 만큼 판단하고 행동에 옮긴다. 아직 10대였다. 너무 어린 나이였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고 생각 또한 미치지 못했다. 그저 어른이 되자. 어른이 되어 힘을 가지자. 하지만 결심한대로 어른이 되어 어느 정도 힘을 가지게 되니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아직 너무 어리고 어리석었던 자신의 판단조차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의 일부로 인정해야 한다.
후회는 나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 혹시 모를 다음을 위한 경계로 삼는다. 자신을 채찍질하여 성장시키는 계기로도 삼는다. 그래서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하고서도 당당히 의사가 되어 사랑하는 홍지홍과 나란히 설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비록 결과는 무시와 비웃음이었지만 무려 국일병원의 병원장인 진명훈(엄효섭 분)과도 잠시나마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 유혜정은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 자신도 많은 일들을 자신의 의지로써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어찌되었거나 의사로서 유혜정에게는 아직 많은 가능성과 미래가 남아 있다. 어쩌면 더 먼 미래에는 진명훈과의 입장이 뒤바뀌는 불가능해보이는 일도 이루어질지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서 돕고 싶다. 그를 위해서 그의 어려움을 자신이 대신해주고 싶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레지던트이고 펠로우의 역할을 대신하기에는 너무 미숙하고 경험도 실력도 부족하다. 진서우(이성경 분)의 무심한 거절에 더이상 말도 한 마디 못붙여보고 힘없이 물러나야만 한다. 그 순간에도 역시 피영국(백성현 분)은 자신의 지난 시간들을 후회하고 있었을까? 친구였다. 한때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돌아봐주기만 바라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수술실에서 한심한 모습으로 물러난 이후 피영국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자세하게 그려지지 않고 있었다. 딱 그 만큼의 비중이다. 수술하는 내내 피영국과는 달리 진서우는 그를 떠올리지 않고 있었다.
책임이란 그를 위한 최소한의 능력을 전제한다. 능력이 되지 못하면 책임도 다할 수 없다. 책임에 비례한 능력은 의무이며,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무능은 죄악이다. 사람이 죽는다. 의사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된 판단에 하나의 목숨이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사로서 최선을 다했다. 하기는 변명조차 아니었다. 굳이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설사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한들 유혜정이 병원장 진명훈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우는 아이에게 사탕 하나를 던져준 것 뿐이었다. 한 푼 돈도 들지 않고 대단한 수고도 들어가지 않는 그저 말뿐인 사탕을 던져주며 조용히하라. 조용히 하지 않는다고 자신에게 크게 손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하필 직전 실수는 아니지만 병원 의료진의 문제로 인한 사고로 한 사람이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책임을 미루는 사이 자칫 하나의 목숨이 병원에서, 그것도 의사의 무관심과 방치로 인해 사라질 뻔한 위기가 지나갔었다. 바로 그때문에 유혜정 자신도 한 달 간 정직이라는 징계를 받고 있었다. 진명훈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의사 또한 한 명의 인간이었고 불완전한 존재였다. 의사로서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이라는 것도 분명 존재했었다. 의사로서 홍지홍과 정윤도(윤균상 분) 사이에도 분명한 실력과 경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무능에 책임을 물를 수는 없다. 최소한의 존엄과 양심마저 저버렸다. 홍지홍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유혜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실 그런 점에서 진명훈과 비교되는 것이 레지던트 최강수(김민석 분)의 존재다. 뇌수막종으로 더이상 정상적으로 의사로서의 업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연락까지 두절되었었다. 스텝이 지시한 내용이 그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위급한 환자는 없었다. 능력이 미치지 못했고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결국 의사로서 환자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음에도 두 사람 다 외면한 채 자기만의 사정에 빠져들었다. 최강수가 저지른 실수와 잘못보다 환자로서 최강수의 치료가 우선이다. 의사와 환자지만 같은 동료고 가족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동기다. 의사로서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의지다. 아직 최강수는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더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 더 실력있는 의사가 되겠다. 오래전 어느 지점까지 진명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벽 앞에 좌절했을 때 역시 길을 잃은 열정과 희망은 자기를 먹이로 삼는다. 자기가 먼저 자기를 포기했을 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괴물 뿐이다. 딸에게는 그래도 아직은 아버지이고 싶다. 의외로 소박한 바람이다. 쉽지 않은 꿈이기도 하다.
유혜정을 설득하기 위한 홍지홍의 노력이 처절하다. 할 수 있는 무엇이든 해 보고 싶다. 이대로 유혜정을 남겨둔 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자기가 유혜정을 대신해서 사람을 죽여주겠다. 자신만의 확신에 사로잡힌 유혜정의 마음에 그 무모할 정도로 저돌덕인 진심에 그만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곁에 남아 지켜줄 단 한 사람이다.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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