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스 - 시작의 끝, 끝의 시작, 끝맺음에 대해서...
누군가를 끝까지 미워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미움을 끝내는 것은 그보다 몇 배는 더 어렵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미움이라는 감정은 스스로 덩치를 키우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만다. 언젠가는 감당할 수 없이 커져버린 미움으로 인해 자기마저 먹히고 마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모르기에 - 정확히 멈춰도 좋은지 모르기에 어쩔 수 없이 힘들고 괴로운 가운데도 끝까지 가야만 한다.
홍지홍(김래원 분)이 어쩌면 유혜정(박신혜 분)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막아서려 했던 이유였다. 차라리 자기가 유혜정을 대신해서 병원장 진명훈(엄효섭 분)을 죽이겠다. 자기가 사랑하는 유혜정의 손에 피가 묻게 하지 않겠다. 언젠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후회하게 된다면 그마저 자기가 대신하겠다. 지금 자신의 모든 미움과 저주가 허무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보다 더 가치있고 더 소중했던 것들이 아쉬워지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 사랑이란 이기적이다. 자기가 대신 감당할 수 있다면 유혜정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차마 보고 싶지 않다.
누군가를 끝까지 미워할 수 있는 성격 자체가 아니었다. 지나치게 다정했고 그만큼 섬세했다. 유혜정이 어린 시절 엇나갔던 것도 그만큼 주위의 감정이나 생각을 예민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한때 서로 사랑했던 만큼 더욱 서로를 상처주고 스스로 상처입어야 했던 부모의 비극에 어린 유혜정마저 휘둘리고 말았다. 다정하지 않았다면 - 부모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새삼 그렇게 상처입을 일도 없었다. 스스로를 상처입힐 일도 없었다. 누구보다 누군가를 미워해서 상처입는 것은 유혜정 자신이다. 그런데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미워하는 것을 끝내는 방법을 모른다면 그대로 계속 미워하는 수밖에 없다. 끝내야 하는 이유도 끝낼 수 있는 방법도 모른다면 미워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아직 유혜정은 미숙했다.
의사로서의 성장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인간으로서의 성장이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해야만 했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의사로서 그것을 외면해서는 안되었다. 그렇다고 여전히 환자를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환자를 살리는 일에 전력을 다한다는 것도 어딘가 모순되었다.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하고 어려운 수술인 만큼 만에 하나라도 여지를 남겨서는 안되었다. 비로소 이유가 생겼다. 자신이 의사로서 스스로 당당하고자 한다면 결코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였다. 친구라 부르며 진서우(이성경 분)마저 찾아와 자신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다시 찾은 친구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서우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이유를 찾으니 방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이없이 너무 쉽게 찾아진다. 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수술실로 들어가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어째서 그동안 떠올리지 못했을까. 할머니는 자신을 수술할 의사에 대한 믿음과 기대로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을 위로하며 수술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최소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 먼 길을 떠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결과야 안 좋게 끝났지만 수술실로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진명훈은 최고의 의사였다. 그것에 감사한다. 다만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대신 의사로서 환자인 진명훈으로부터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 복수이면서 보답이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무엇이든 자신이 받은 그대로 진명훈에게 돌려준다. 아무것도 남김없이.
아버지 유민호(정해균 분)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장면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천륜을 억지로 거부하지 않는다. 딸이기에 당연히 아버지가 아프고 힘들면 걱정되고 신경쓰인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와 딸로써 함께 한 시간이나 기억들은 두 사람 사이에 거의 없었다. 머리로는 아버지라고 알아도 가슴으로는 그것을 직접 느끼지 못한다. 부모자식이란 천륜이면서 인륜이다. 낳은 정 만큼이나 기른 정도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성장기에 버리다시피 방치하고서 나중에서야 아버지임을 주장한다면 자식이라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 그런 유혜정의 날서린 감정마저 담담히 받아들이는 유민호의 모습 또한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다. 단지 너무 늦었다.
끝맺음에 대한 이야기다. 어떻게 끝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들이다. 진명훈에 대한 오랜 미움을 끝낸다. 아버지를 향했던 오랜 원망 역시 정리한다. 진서우와의 오랜 오해도 풀어낸다. 물론 원래대로 다시 돌아가지는 않는다.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할 수는 있다. 진서우와의 우정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진서우와 피영국(백성현 분) 사이에 오랜 우정의 끝은 새로운 사랑이었다. 아무 반전 없이 결국 유혜정은 홍지홍과 이루어지지만 정윤도의 사랑은 끝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랑이 끝난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새롭게 시작한다. 명언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안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
하나의 생며이 태어나고 다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진다. 새로운 운명을 만나는 기쁨의 순간 오랫동안 지켜왔던 단 하나의 운명이 자신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를 위한 과정이었다. 그를 위한 기다림이었다. 비로소 떠나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맞아들일 수 있었다. 하나의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시간이 다가온다. 하나의 인연이 떠나면 새로운 인연이 돌아온다.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떠나보낼 수 있기에 맞을 수 있다. 그런 윤회 속에 오늘이 있고 지금이 있다. 그런 지금에 충실한다. 어쩌면 마음껏 미워하고 원망했기에 이제라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사랑의 끝은 항상 이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시작은 모르지만 끝은 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홍지홍에게 정식으로 청혼받는 순간 비로소 유혜정은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부터 시작될 새로운 이야기들은 그들 자신의 몫이다. 처음부터 일관되다. 환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는 이야기가 아니다. 의사가 주인공이다. 의사인 자신들이 주인공이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할 수 있기를.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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