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 차마 죽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살아야 한다는 무게
그래도 살아야 한다. 죽을 수 없으니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죽을 것을 알면서 나머지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일까? 차라리 체념할 수 있으면 이렇게까지 절망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너무 두렵고 고통스럽다.
그래도 조금은 여유가 있을 줄 알았던 죽음이 바로 문앞까지 찾아왔다.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남은 줄 알았는데 그새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자신을 보고야 말았다. 이렇게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자신은 암으로 죽게 될 것이다. 불과 얼마 남지도 않았다. 두려움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부터 해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직 자신은 자신의 삶을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
두려움을 잊게 위해 입술을 꽉 깨문다. 잠시나마 고통을 잊기 위해 목이 터져라 비명도 질러본다.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고 팔다리를 놀리는 사이 조금이나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동안 누리보지 못한 사치를 마음껏 누린다. 그동안 감히 상상만 해오던 쾌락들을 거침없이 즐긴다. 자신을 내던진다. 있는대로 내굴리며 망가뜨린다. 이제와서 새삼 답을 찾아 나서기에는 남은 시간도 여유도 너무 없다. 그냥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치며 발악해 본다. 성급하게 누군가에게 기대려 해 본다.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여행마저 포기하고 있었다. 어차피 가지 못할 것이라 지레 체념해버린 것이다. 어차피 가더라도 더이상 좋은 일따위 없을 것이라 단정지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절망이란 역시 아직은 살아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누구라도 제발 아무거라도 자신을 붙잡아주기를 바란다. 그래도 아직은 살아갈 수 있음을. 살아있을 수 있음을. 하필 그 순간 그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 의사 홍준기(김태훈 분)였다. 차마 못할 짓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병원 옥상에 서있던 몇 분이야 말로 이번회차를 압축하고 있을 것이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살고 싶지만 살 수도 없다. 죽으려 하지만 살아야 하고, 살고 싶지만 이제 곧 죽어야만 한다.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섭리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아마 처음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때가 되면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저렇게 울음을 터뜨리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무려 수천수만 년을 답없는 답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과연 이소혜(김현주 분)가 마침내 찾게 될 답은 어떤 것일까.
이소혜의 절망과 류해성(주상욱 분)의 철없는 일상이 얄궂도록 교차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기가 어떻게 되든 세상 대부분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상관이 있더라도 어느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세상은 여전히 밝을 것이고 사람들은 한결같이 즐겁고 행복할 것이다. 몰라준다고 서운할 일도 없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일도 없다. 그마저도 무심한 일상의 한 부분일 것이다. 류해성의 철없음이 그래서 화나도록 이소혜의 절망어린 현실과 대비된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은 표정으로 이소혜에게 투덜거리는 모습은 얼마나 잔혹한가.
백설(박시은 분)이 절망이라 여기는 그것들은 사실 절망이 아니다. 아직 살아있다. 아직 더 많은 시간을 살아있을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아주 작은 계기라도 자기 앞에 나타나게 된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몫이다. 선택에 대한 결과 역시 모두 자기의 책임이다. 억울하고 답답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나왔다가 우연히 한 사람과 만나게 된다. 상대인 김상욱(지수 분)에게도 그것은 전혀 예정에 없던, 감히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우연한 만남이었다. 과연 앞으로 두 사람의 우연은 어떤 운명으로 발전하게 될까.
나름대로 절박하지만 그러나 진지하지는 않다. 어째서 류해성이 그토록 연기를 못하는가 어렴풋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상대의 진심에 대해 무지하다. 정확히 무관심하다. 상대의 지금 말투가, 표정이,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전혀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보이는대로 들리는 대로 그대로 받아들여 버린다. 사람은 좋다. 그러나 연기자로서도 좋을까. 이소혜가 암에 걸리고 류해성과 재회하게 된 것도 어떤 운명 같은 것은 아닐까. 아주 오래전 모든 오해의 시작인 어떤 엇갈림이 있었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게 마무리하는 것은 매우 탁월하다. 류해성의 발연기를 보며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만다. 너무 해맑아서 차라리 이것도 괜찮지 않은가 스스로 납득하고 만다. 발연기도 이쯤이면 하나의 예술이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어차피 누군가의 비극은 다른 누군가에게 희극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절망과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단지 잠시의 웃음으로 소비되고는 한다. 이소혜의 사정과 상관없이 저마나 자기의 이유로 바쁘고 정신없다. 류해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사람이 그런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단지 사랑이 필요해서였을까? 반드시 그 사람인 것일까? 하필 그때 그곳에 그가 있었을 뿐일까? 하지만 마지막으로 구원의 손을 내민다. 살려 달라. 살게 해 달라. 살아갈 이유를 만든다. 홍준기에게는 가혹하다. 이소혜의 비명이 구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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