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 짧은 행복과 어느새 바짝 다가온 운명의 무게

까칠부 2016. 9. 21. 05:05

어쩌면 이런 것이 왕인지 모른다.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의 선조를 떠올리게 한다. 항상 의심한다. 항상 불안해한다. 혹시라도 빼앗기지는 않을까. 혹시라도 누군가 탐내고 있지는 않은가. 왕이 잔인한 것은 그 마음이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존귀한 자리에 있는 만큼 지켜야 하는 것들도 남다르다. 그를 위해서라면 한낱 어린아이의 목숨 쯤이야.


아마 역사상 많은 왕들이 드라마의 왕(김승수 분)과 같은 지옥속에 살았을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마저 믿지 못한다. 아내의 아버지인 장인을 두려워하며 꺼려한다. 어차피 그들의 권력은 왕인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왕의 아내이고 왕의 장인이니 지금의 권세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과 태도를 바꾸면 그들을 왕인 자신의 신하로서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 수 있다. 신하인 그들의 이익이야 말로 왕인 자신의 이익이다. 굳이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다. 왕인 자신의 권력을 그들과 나누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굳이 세자 이영(박보검 분)이 권신 김헌(천호진 분)과 맞서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안내상 분)이 정확히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단지 김헌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상대로 이기려는 것인가. 아니면 실력있는 인재를 부정없이 바르게 뽑고자 하는 의도가 먼저인가. 그래서 대신들이 요구하는대로 과거를 예정대로 치르는 대신 시제만 즉석에서 바꿔 내고 있었다. 대신들은 적이 아니다. 정치에는 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을 모두 내쫓거나 죽이지 못하는 한 그들을 현실로써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지 못하니 왕은 지금껏 주눅들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심해 보이는 것과는 달리 누구보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다. 어쩌면 그래서 가장 왕다운 왕이기도 하다.


왕이기에 자신이 무엇을 포기하고 희생해야 하는가를 안다.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려진 왕이라고 하는 운명의 무게를 안다. 아직 세자는 왕이 아니다. 왕이 되고자 한다면 사랑하는 여자 하나 쯤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아내가 억울하게 죽었어도 그 죽음마저 아무렇지 않게 덮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이해가 안되는 것은 그러면서 또한 항상 그런 자신의 속내를 김헌 앞에서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력한 모습과도 관계가 있다. 어떻게 해도 조정의 모든 것은 왕인 자신의 소유여야 한다. 만일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면 차라리 포기하고 버리겠다. 그냥 고집이다. 이런 왕이 절대의 권력을 가지게 되면 역사에 남는 명군이 되거나 아니면 모두의 비난을 받는 폭군이 된다. 


하지만 세자는 아직 왕이 아니기에 그같은 왕이 가져야 할 다짐이나 각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왕이라는 자리가 가지는 무게와 왕이 되기 위해 자기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저 아버지가 왕이니 왕의 아들인 자신이 대를 이어서 왕이 될 뿐이었다. 김헌과 화합할 수 없다면 김헌과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김헌을 대신해서 조정에서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자신의 측근을 가져야만 한다. 역시 전근대왕조인 조선이 배경이라는 사실을 살짝 간과한다. 굳이 왕이 사랑하는 여인이 정비인 중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세자의 아버지인 지금의 왕도 중전 말고도 후궁인 숙의 박씨(전미선 분)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어째서 세자의 국혼이 문제인 것일까.


장차 지금의 세자가 왕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본다. 타협하는 것도 싫고 양보하는 것도 싫다. 나누는 것은 더더욱 싫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가 마음을 준 여인에게는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려 한다. 다음대 왕으로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마저 그 여인에게 떠넘기려 한다. 그래서 그로 인해 자신이 실패한 왕으로 기록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왕이 탐욕스러운 것은 그 책임까지도 모두 자신에게 속하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바람이 불고 이슬이 내리는 것까지 모두 왕의 책임이어야 했다. 홍라온(김유정 분)에 대한 사랑도 지키면서 맞서기에는 김헌은 이미 너무 크고 강한 적이다.


아무 근심없이 다정한 모습이 달달하기만 하다. 손가락이 곱고 혀까지 꼬인다. 그동안 애써 눌러온 것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아예 어디까지 가려는지 당황스럽기조차 하다. 하지만 그들은 과연 사랑만 할 수 있을까? 세자라는 신분이, 더구나 백성들을 위해 봉기를 일으킨 홍경래으 단 하나 남은 딸이라는 사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벌써 왕은 세자의 앞날을 위해 국혼을 추진하고, 살아남은 홍경래의 지인들은 새로운 구심점으로 홍라온을 찾아나선다. 홍경래를 따르던 이들은 부당한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이고, 어찌되었거나 세자는 그들로부터 조선이라는 현실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다. 그 사이에서 김병연(곽동연 분)은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세자에 대한 의리와 홍라온과의 인연과 조선에 대한 복수심과 백운회의 은혜 사이에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상황은 그도 감당할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간다.


추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상선(장광 분)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의 문양을 홍라온이 알아보았다. 그리고 홍라온이 자신의 손수건의 문양을 알아본 사실을 상선도 알았다. 얼마전 홍라온이 청나라로 끌려갈 뻔했을 때 그녀의 출생과 가족에 대해 물었던 일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이미 시청자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상선은 홍경래를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이 알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왕이 말한 과거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을 당시 궁궐로 그 무리가 침입해 왔을 때 안에서 내통한 것도 상선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채 추리가 이어가기도 전에 김병연이 배신자로 몰려 처단되려는 순간 구원자로 등장하며 백운회의 수장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과거 아버지가 죽고 혼자 남은 김병연을 구한 것도 바로 상선이었다.


홍경래가 남긴 뜻을 자신들이 잇기 위해서라도 홍경래의 딸인 홍라온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필 홍라온과 자신과의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답을 듣기 위해 세자가 함께 정도전을 찾아가려던 순간이었다. 홍라온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자체가 상선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것과 같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름을 상선이 알고 친근히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세자가 그 모습을 본다. 조정을 뒤엎으려는 백운회의 수장과 조선을 이어갈 세자가 홍라온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다. 운명은 가혹하게 그들의 앞에 가로놓인다.


성격 나쁜 작가일수록 드라마가 끝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주인공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마음껏 서로 사랑하며 지금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끔 배려해준다. 어차피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이다. 아직 남은 이야기만큼 고난과 시련이 그들의 앞에 기다리고 있다. 행복했던 만큼 고난도 시련도 절망도 깊어진다. 물론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이루었을 때 느끼는 기쁨도 성취감도 그에 비례해서 커진다. 시험과도 같다. 자신들이 가진 사랑의 크기와 무게를 계량하여 비교한다. 이만큼 그들의 사랑은 순수하고 고결하다. 사랑을 이룰 자격이 있다.


조선이야 어찌되었든. 권력이야 누가 가지든. 사실 아무 상관이 없다. 지난 역사란 원래 그냥 엣날이야기다. 하물며 픽션이다. 작가에 의해 창조된 허구다. 배경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들은 사랑을 한다. 김윤성(진영 분)마저 세자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는다. 사랑만 하기도 버거운 젊음들이다. 진한 눈물의 예감에 안쓰러운 웃음을 짓는다. 악취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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