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 지금 내가 살아있는 하나의 이유
둘도 필요없다. 하나면 된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내가 살아야 한다. 내가 살아도 된다. 내가 살 수밖에 없다. 아무거라도 그 하나만 있으면 어떻게든 사람은 살 수 있다.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기다릴 힘도 생긴다. 때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그 하나를 찾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그 하나로 인해 사람은 살아간다.
단 한 사람이었다. 아득한 절망 속에 자신을 믿어주고 인정해 준 단 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포기해서는 안된다. 절망해서도 안된다. 자학해서도 안된다. 나를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위해서라도 행복해져야만 한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행복해지려 한다. 조금 더 강해지고 조금 더 당당해지려 한다. 그래서 그 모습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려 한다. 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다. 그런 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소혜(김현주 분)만이 아니다. 이소혜가 류해성(주상욱 분)으로 인해 말기암에도 불구하고 살아아갈 힘을 낼 수 있었듯 류해성 역시 소속사 대표 최진숙(김정난 분)의 그야말로 악마와도 같은 공작과 협박에도 끝까지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다.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두려워 할 치명적인 스캔들이었다. 이미지로써 소비되는 연예인인 만큼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킬 스캔들이란 그 자체로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 사실이 밝혀지고 진실까지 널리 알려지더라도 이미 각인된 이미지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류해성도 이미 알고 있었다. 최진숙의 협박은 단순한 협박이 아닌 냉혹한 현실이고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류해성의 곁에 이소혜가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와서는 사실여부부터 묻는다. 그리고 믿어준다. 지지해준다. 단호하게 조언해준다. 최악의 순간에도 이소혜만큼은 자신의 곁에서 한결같이 자신을 믿어주고 지지해주고 함께해 줄 것이다. 비로소 자신감이 생긴다.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배짱도 생긴다. 이소혜의 장담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차피 최진숙 역시 드라마에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한 뒤였다. 주연인 류해성이 상처입으면 드라마에 투자한 최진숙 또한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 말대로 되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몇 배 더 현명해지고 용감해진다. 이길 수 있게 된다.
한참은 어린 김상욱(지수 분)이 쪽지로 남긴 한 마디가 처참한 상황에 놓인 백설(박시연 분)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었다. 위로 정도가 아니었다. 그저 자기연민에 울고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김상욱이 준비한대로 멋지게 차려입고 당당히 남편의 사무실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남편에게 선언한다. 나인가, 아니면 그 여자인가? 새삼 그여자라 해도 더이상 상처입을 일따위 없다. 절망할 일도 없다. 어쩌면 그 순간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보다는 남편 최진태(김영민 분)의 한심한 주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가치없지 않다. 자기가 그렇게 한심하지 않다. 아주 작은 자신감이고 아무것도 아닌 자존심이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이 그녀를 강해지게 만든다. 김상욱이 그녀에게 걸어준 주문이다.
실제 정작 백설이 집을 나가고 나니 그토록 그녀를 무시하고 학대하던 시집식구들부터 걱정이 한가득이다. 이미 밥이며 빨래며 청소며 사소한 뒤치닥꺼리에 심지어 제사까지 어느것 하나 집안일 가운데 백설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백설이 없으면 당장 곤란해지는 것은 시어머니와 시누이인 최진숙 자신이었다. 만에 하나 백설이 자신들의 집안사정을 모두 세상에 알리면 더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될 터였다. 요양소에 있는 어머니 때문에 지금껏 힘들게 참아왔지만 설마 혼자 힘으로 엄마 하나 모시지 못할까. 어쩌면 처음으로 대등해져 있었을 터다. 만일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자신도 더이상 참고 있지는 않겠다. 시어머니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멍투성이가 되어 쫓겨나던 비참함은 어디에도 없다. 한 순간에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진다.
암환자가 아닌 그저 사랑에 빠진 여자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암마저도, 임상치료로 인한 부작용들마저 자신의 일부라 여기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 단지 말기암에 걸려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환자가 아닌 그마저도 모두 포함해 한 남자와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그저 연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하루를. 지금 이 순간을. 그와 함께 하는 매일의 매순간의 행복과 기쁨이 죽음의 공포마저 잊게 만든다. 사랑할 수 있는 동안 마음껏 사랑한다. 차라리 내일의 죽음보다 오늘 마음껏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울 수 있다. 만일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닐까. 다만 기적을 바라기에도 이소혜의 암은 너무 심각한 상태다.
홍준기(김태훈 분)의 마음도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이소혜만이 아닌 홍준기 자신에게도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언제 당장 내일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 내가 받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 아니라 내가 해주지 못하는 것이 걱정이다. 내가 더이상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없는 것이 걱정이다. 무언가 하나라도 더 해주기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인내한다. 인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그에게는 만족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이라도 이소혜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기를. 웃는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그것이 그에게도 살아가는 힘이 된다.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이타지만 그래서 이기다.
어째서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는가. 어째서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서로에 의지해 서로를 이유로써 살아가는가. 더 절실한 연인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그들의 의지와 용기를 통해서. 그래도 사람은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람은 사랑하기에 살아갈 수 있다. 마지막의 절박함이 진실을 더 진실로 전해준다. 사랑하기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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