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닥터 김사부 - 젊은 의사들의 성장이 어른 김사부를 일깨우다
오히려 특별한 이야기이기에 더 평범해져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이게 하려면 그들이 쉽게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보편과 일상의 이야기들을 빌려서 들려주어야 한다. 배경은 병원이고 주인공은 의사지만 정작 그들을 통해 보여주는 이야기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흔한 인간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곳이 병원이고 그들이 의사이기에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아이들은 언제 어른이 되는가. 어른에게 기대지 않게 되었을 때다. 어른의 등이 아닌 눈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게 된다. 그저 눈치를 보며 따르기보다 당당히 자기 주장도 할 수 있게 된다. 대등한 인격이 된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실력이 뛰어나도 김사부(한석규 분)도 의사, 윤서정(서현진 분) 자신도 의사다. 강동주(유연석 분)와 마찬가지로 모두와 함께 있을 때는 자신보다 상급자인 김사부의 지시를 따라야겠지만 환자와 일대일로 마주한 상황에서는 다시 의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환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의사인 자신밖에 없다.
오히려 대견하다. 그동안 자기 등만 바라보며 졸졸 뒤만 따라다니고 있었다. 한 점 의심조차 없었다. 한 마디 반항조차 없었다. 전문의까지 딴 의사에게 잡일인 오더리나 하라 시키는데도 그저 몸을 굽힌 채 그의 처분에만 모든 것을 맡길 뿐이었다. 한 사람의 의사다. 당장은 자기가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수 있지만 결국 의사로써 환자와 일대일로 마주했을 때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 그를 위해 필사적으로 실력을 키우고 경험을 쌓으려는 것 아니던가. 내 환자는 내가 온전히 책임지고 반드시 살리겠다. 그를 위해서라면 김사부라는 존재마저 얼마든지 적으로 돌릴 수 있다.
한 번도 의심이란 것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과연 자신을 어떻게 여기는가에 따라 의사로써 자신의 운명까지 결정될 수 있었다.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감히 그와 맞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강동주는 그동안 하늘처럼 받들며 따르던 본원 외과장 송현철(장혁진 분)의 말조차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기준으로 다시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 흔들리기도 했었다. 만일 외과장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김사부가 외과장 송현철이 말한 그런 사람이라면? 하지만 자신의 앞에 그 김사부가 있고 그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그러면 지금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김사부는 송현철이 말한 그런 사람인가?
아버지로부터 야단맞았다. 나름대로 의사로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훌륭히 해냈다고 자신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욕설과 함께 주먹부터 날리고 있었다. 과연 자신이 잘못했는가. 이전부터도 아버지 도윤완(최진호 분)에 대한 불만이나 반감 같은 것이 있었는가는 모르겠다.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싶었을 게다. 의사로써 이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대해 직접 스스로 책임지고 싶었을 게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기에는 자신은 이미 성인이다. 누군가로부터 지켜지기에는 오히려 누군가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다. 그동안 거의 비중이 없었기에 인상이랄 것도 없었다. 반항기를 닮았다. 자신은 이미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성장드라마다. 돌담병원은 아직 미숙한 병아리들을 성장시키는 인큐베이터와도 같다. 김사부는 이름 그대로 엄격하지만 합리적인 자상한 아버지다. 괴팍하지만 누구보다도 병원식구들을 생각하는 수간호사 오명심(진경 분)은 어머니를 대신하는 큰누나다. 어머니가 되지 못하는 것은 그만한 권위를 부여받지 못한 때문이다. 일적으로나 인간적으로 크게 신뢰하기는 하지만 김사부의 경우처럼 전적으로 복종하며 따를만한 어떤 권위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어머니인 듯 외할머니인 듯 병원장 여운영(김홍파 분)이 모두를 애정과 신뢰로써 지켜보고 있다. 어떤 이유로든 성장기에 있는 세 아이, 아이라기에는 이미 어른이고 의사면허증까지 가진 세 남녀가 그들의 울타리 안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그들의 성장은 역시나 동굴병원이라는 알에 갇혀 있던 김사부 아닌 의사 부용주를 깨어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딱 정확히 반대편에 서있는 안티테제 도윤완의 존재야 말로 드라마가 보여주고자 하는 성장의 정체를 예감하게 하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외과장 송현철의 대사를 통해 분명히 한다. 의사지만 의사로서 지켜야 할 책임과 윤리보다 그들이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그들이 추구하는 성공과 성취에 대해서도. 한때 강동주도 그들을 쫓아 그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는 갑옷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투사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것을 가짐으로써 자신은 안전해질 수 있었다. 그것이 없다면 자신은 벌거숭이에 지나지 않았다. 벌거숭이가 되어서도 오히려 더 자신있고 당당한 사람들이 있다. 볼품없고 추레한 자신의 몰골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차라리 다른 이들의 눈을 멀게 만든다.
어른으로서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기만족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일지 몰라도 어른으로서 무책임한 방임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이 혹독한 현실에 떠밀려 혼자만의 세계로 도망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수많은 젊은 가능성들이 남겨진 현실에 치이고 부딪히며 비틀린 모습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의사로서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익히고 경험한 모든 것들을 재능있는 뒷세대에 전해주어야 할 책임 또한 있었다. 그렇게 자신 역시 스승으로부터 선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히며 여기까지 왔을 터였다. 부양가족이 생겼다. 성가시고 귀찮은데 그리 나쁘지는 않다. 이제는 아예 우연히 눈에 뜨인 젊은 재능을 자기에게 달라 도윤완이라는 만만치 않은 존재를 자극하고 있었다.
강동주와 윤서정, 도인법이 김사부를 통해서 의사로서 성장해간다면 김사부는 이들의 존재를 통해 어른으로서 자신을 일깨워간다.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 단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잊은 척 지내고 있었다. 짐짓 돌담병원으로 보내진 젊은 의사들을 윽박지르듯 내쫓은 것도 절망한 자신에 대한 심술이었다. 강동주가 일깨워주었다. 윤서정이 돌아보게 해주었다. 도인범은 자기 아버지 답지 않아 더 마음에 든다. 김사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정체일지 모른다. 그런 젊은,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가능성들을 위한 울타리. 그들을 보살피고 가르치고 길러내는 보금자리. 그리고 그들이 마음껏 실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 비로소 십수년이나 지나서 도윤완과 정면으로 맞설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도윤완은 서울에 있다. 도윤완을 따르는 외과장 송현철 역시 서울 본원에 있다. 도윤완과 김사부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다. 이번처럼 일부러 멀리 서울에서 정선까지 내려와 서로 마주해야 한다. 아예 서울에 있는 외과장 송현철을 병원장을 따르는 본원의 사람들과 함께 돌담병원으로 내려보낸다. 서울과 정선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돌담병원이라는 공간으로 한정해 버린다. 대신 도윤완과 김사부의 노골화된 대립관계가 새롭게 돌담병원으로 파견온 본원사람들과의 사이에 심리적인 벽을 만든다. 과연 좁은 돌담병원에서 도윤완을 대신한 송현철과 김사부는, 그들을 따르는 젊은 의사들은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갈까. 그리고 그 사건들은 어느곳을 향하게 될까.
김사부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한다. 필사적으로 버티며 꺾이지 않은 윤서정의 존재감이 있다. 마치 배경처럼 강동주는 그곳에 있다. 도인범의 등장은 갑작스럽다. 아직 캐릭터를 종잡지 못하겠다. 강동주나 윤서정처럼 - 아니 윤서정 역시 아직 떨처내야 할 구속들이 남아 있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오늘을 제약한다. 어쩔 수 없는 수많은 사정들이 끝내 후회를 만들고 미련을 만든다. 사람없는 시골의 버스정류장에서 도인범은 혼자 생각에 잠긴다.
수술장면은 그저 거들 뿐이다. 환자를 치료하는 장면 역시 단지 구색에 지나지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 과정들을 지켜본다. 수없이 꺾이고 부서지고 그래서 땅바닥에 뒹굴면서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다.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감싸고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함께 손잡고 나간다. 그곳에 그들이 있는 이유다. 그들이 모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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