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곤 - 망부석
간밤에 울던 제비 날이 밝아 찾아보니
처마 끝엔 빈둥지만이
구구 만리 머나먼 길
다시 오마 찾아가나 저 하늘에
가물 거리네 헤에야 날아라
헤야 꿈이여 그리운 내 님 계신곳에
푸른 하늘에 구름도 둥실둥실 떠가네
높고 높은 저 산 너머로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
깊은밤 잠못 이뤄 창문열고 밖을보니
초생달만 외로이 떴네
멀리 떠난 내님 소식 그 언제나
오실텐가 가슴 졸여
기다려지네 헤에야 날아라
헤야 꿈이여 그리운 내 님 계신곳에
달아래 구름도 둥실둥실 떠가네
높고 높은 저 산 너머로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
달아래 구름도 둥실둥실 떠가네
높고 높은 저 산 너머로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
국악 가요라 하면 '망부석'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테고 혹은 '칠갑산'을 먼저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마저 모르는 세대도 이미 넘쳐난다. 1977년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폐허에서 다시 일어난 자신감과 불의한 시대에 맞서기 위해 민족과 전통으로 돌아가려 했던 젊은 고민이 현대음악과 전통의 국악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그 결과 김태곤의 1집 '김태곤 창작 11곡'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물론 김태곤이 처음은 아니었다. 전부터도 많은 선배음악인들이 한국의 전통음악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현대대중음악에 접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었다. 신중현도 그랬고, 김정호도 그랬으며, 곡을 쓰면서 전통음악의 특징과 요소들을 적극 활용한 경우까지 포함하면 이루 헤어릴 수 없을 정도였다. 다만 아직까지 그같은 시도들은 철저히 외국에서 시작된 현대대중음악의 문법과 눈높이로 전통음악을 이해하고 그 안에 수용하기 위한 것들로 한국 전통음악은 단지 타자이고 객체에 지나지 않았었다. 반면 김태곤의 음악은 그 뿌리는 포크였지만 한국 전통음악에 내재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격렬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가사마저도 아무리 70년대라지만 현대에 흔히 쓰이는 표현보다는 어쩐지 더 오래전에 쓰였음직한 옛스런 어휘들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곡의 구성은 여러 국악악기를 사용하면서도 오히려 현대의 밴드음악에 더 가깝다. 타악기와 관악기를 쓰는 전주가 있고 간주가 있고 반주가 있다. 하지만 연주와 곡의 구성은 분명 국악의 그것이다. 아예 같은 앨범에서 '아리아리 아라리요'는 국악의 멜로디를 철저히 현대악기를 통해 연주하고 있었다. 어떻게 한국 전통음악과 현대대중음악을 같은 비중 같은 눈높이로 대등하게 통합할 수 있을 것인가. 이후 김수철이나 김도균 등의 시도가 보다 국악에 가까웠다면 김태곤은 바로 그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그같은 김태곤의 음악적 시도들은 한국 이외의 다른 나라의 전통음악을 대중음악과 접목하려는 보다 실험적인 시도들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때 한국에서 가장 많은 다양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음악인으로 김태곤이 손꼽힌 것은 그런 그의 음악적 욕심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 음반이 대단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일 것이다. 특히 쌍두마차격인 '송학사'와 '망부석'은 이후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불리고 들릴 정도로 큰 히트를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망부석'이라는 노래를 김태곤의 라이브로 듣게 된 것도 처음 노래가 발표되고 무려 10년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주병선이 '칠갑산'을 들고 나올 때까지 국악가요라 하면 '망부석'을 가장 첫손에 꼽았고, 아니 그보다는 그냥 거의 유일하다 여기고 있었을 정도였다. 다만 너무 큰 성공을 거둔 탓에 대중음악인으로서 김태곤의 존재를 정의해 버린 것이 이후 더 다양한 실험적 시도들을 담은 그의 음반이 철저히 외면당하고 묻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독한 아이러니다. 덕분에 다양한 음악적 실험들을 시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으면서도 그것들을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되기도 했었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장구와 기타를 배웠다 하니 기초는 제대로 닦인 것이다. 대학시절에는 당시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통기타와 포크에 빠져들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군대에서 군악대 활동을 하면서 동료들을 통해서 다양한 악기를 경험하고 무엇보다 국악에 눈뜨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이 다양한 악기를 사용한 정교하고 스케일있는 곡구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참고로 위에 썼듯 김태곤은 스스로 많은 악기들을 직접 배우고 익혀서 실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다루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예 자신의 일인밴드에 '외돌괴'라는 이름까지 붙여 놓기도 했었다. 그야말로 혼자서 노래부르고 악기까지 파트별로 다 연주하는 일인음악인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음악도 하면서 그보다는 다른 일에 더 열심이라 알고 있다.
아무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바로 귀에 꽂히며 입으로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아직 가사도 다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뜨문뜨문 기억나는대로 아무때고 혼자서 따라부르고는 했었다. 가만 보면 언뜻 옛스럽지만 오히려 전혀 옛스럽지 않은 현대어의 가사들이다. 약간의 치트다. 하지만 곡구성은 분명 국악의 그것이다. 국악을 뿌리로 현대대중암윽의 형식을 빌어 구성한 것이다. 그래서 쉽다. 그래서 익숙하다. 대중음악으로서 성공한 비결이다. 하지만 곡 자체만 놓고 보면 쉽지는 않다. 어딘가 10분짜리 완곡버전이 있다 하는데 들어보지는 못했다. 한국대중음악의 역사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주로 포크음악인들이 기여한 바이기도 할 것이다. 단순한 기술인으로서보다 남다른 의식을 가진 엘리트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참 처음 김태곤이라는 가수를 알았을 때도 이 노래 하나로 벌써 10년 가까이 방송이며 뭐며 활동을 하고 있었을 텐데. 한 번은 항상 입는 한복이 아닌 청바지 차림에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서기도 했었다. 춘향가를 록으로 편곡해서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수를 잊은 동안에도 노래는 따라부르고 있었다. 벌써 몇 년이냐. 가수와 상관없이 노래는 기억된다. 오늘도 흥얼거린다. 일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