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골매 - 모두가 사랑하리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성공한 밴드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냥 외워야 한다. 바로 송골매다. 공중파 1위도 몇 번이나 하고 무려 1991년 해체하기까지 12년이나 최고의 위치에 있었던 송골매를 제외하고 과연 어떤 밴드를 그 자리에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들국화도 넥스트도 그에 비하면 너무 짧았고, 부활과 산울림 역시 꾸준하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아이돌이면서 최고의 밴드였다.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도.
무심코 기억을 떠올린다. 아직 공중변소가 남아있던 동네였다. 20원 주면 한 번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서울이었다. 집 앞에는 개천이 하나 흘렀는데 다리도 변변한 게 없어서 공사장에서 쓰이는 구멍난 철판을 대충 철근 위에 얹어 다리처럼 쓰고는 했었다. 난간도 없는데 물살도 제법 센데다 더구나 공장폐수로 악취가 풍겨서 지날 때마다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동네에서 공동으로 쓰던 펌프를 더이상 냄새 때문에 쓰지 못하고 공공수도에서 물을 받아 쓰던 것도 기억난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가요톱10'을 보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 해에 '송골매'가 '모두 다 사랑하리'로 1위를 했었던가 했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다만 저 풍경을 배경으로 그때 구창모의 목소리가 떠오르고는 한다. 노래를 들으면 당연하게 떠오르는 배경이기도 하다. 송골매라는 밴드가 있었구나. 송골매의 멤버들이 주인공으로 영화가 나왔었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뭐랄까 팬이라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들었고 따라불렀고 기억하게 되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원래 히트곡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들으려 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들리면서 내가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음악들은 그렇게 내게 기억되고 있었다. 선후는 잘 모르겠지만 그와 비슷한 무렵에 '못찾겠다 꾀꼬리', '고추잠자리', 'DJ에게', '열애' 기타등등등등등... 당연히 그 중심에 있는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처음 송골매의 시작은 항공대의 캠퍼스밴드 '활주로'와 홍익대의 캠퍼스밴드 '블랙테트라'가 합쳐지면서였다. 배철수가 주도했고 구창모가 프론트맨으로 영입되었다. 당시로서 잘생긴 외모에 미성이었던 구창모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었다. 한 편으로 한 눈에 보기에도 히피스럽고 락커스럽던 배철수의 인기 역시 남자들 사이에 상당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야말로 외모와 미성을 갖춘 프론트맨과 강한 개성을 가진 리더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보여준 첫밴드였을 것이다. 그같은 구도를 이후 부활이 재현하게 된다. 물론 부활에서 김태원의 인기는 배철수만큼은 못되었다.
상당히 소프트한 락을 했음에도 바로 그 점 때문에 활동 자체는 그다지 순탄치 못했었다. 구창모가 송골매를 그만둔 것도 바로 활동이 지지부진하다 보니 돈과는 너무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구창모 자신의 집안사정이 원인이 되어서 멤버들도 당시는 어쩔 수 없이 이해해주었다고 한다. 송골매 그만두고 솔로가 되어 첫음반을 내고 나니 당시로서 감히 상상도 못하던 거액이 한 번에 들어왔다던가? 송골매로 활동할 때는 한 번도 구경해보지 못한 거금이 솔로가 되니까 바로 주머니에 들어오더라 한다. 원래 한국 대중음악에서 밴드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바로 해체되곤 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경제적인 문제들이었다.
'벗님들'의 이치현도 방송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하고는 했는데, 자기들은 프로라서 어떤 음악이고 요구하면 연주할 수 있었는데 캠퍼스밴드 취급받아서 손해를 많이 봤었다. 이치현이 말한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이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음악만을 연주하는가, 아니면 관객이, 혹은 전주가 원하는 음악을 맞춤으로 연주할 수 있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송골매는 전형적인 전자였다. 원래 해체되던 당시까지도 송골매의 연주실력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부활 출신의 이태윤이 배철수에 의해 송골매로 영입된 이유도 그것이었다. 한 번 제대로 밴드다운 밴드를 만들어보자. 하지만 원래 태생이 그렇지 못했었기에 그같은 노력은 오히려 송골매라는 밴드의 수명만 깎아 먹고 말았다.
오로지 자기들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록만을 연주하려 한다. 당연히 그렇다 보니 그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연줄로 서게 된 무대에서조차 시끄러운 록만을 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항의가 적지 않았었다. 하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던 자체가 송골매의 시작이 직업음악인으로서가 아닌 학생들의 취미생활이었던 점도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음악인으로서의 철두철미함이 부족한 점이 배철수에게 압박이 되었고 끝내 송골매를 끝으로 아예 음악 자체를 놓아 버리는 이유가 되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음악에 당시의 젊은이들이 열광했었으니.
음악은 역시 기술이 아니다. 연주력도 떨어지고, 곡쓰기도 그다지 능숙지 못하고, 밴드로서의 퍼포먼스도 그리 대수롭지 못했다. 하지만 젊었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직접 자신들의 노래로 들려주고 있었다. 구창모의 탈퇴 이후 상당기간 침체기를 걷기는 했지만 그 동안에도 여러 노래들을 히트시키며 여전히 우리들의 주위에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소리소문없이 해체되고 사라져버렸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리더 배철수가 라디오를 통해 항상 우리들 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지금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음악전문라디오방송일 것이다. 복고와 향수를 자극하는 '콘서트7080'의 MC도 바로 배철수여서 의미가 있다. 이후 몇몇 멤버들이 새롭게 사람을 모아 만든 송골매는 솔직히 그다지 별로다. 이 새로운 송골매의 멤버 가운데 하나가 부활의 베이시스트 정준교라는 점은 나름대로 재미있다.
가장 어렸을 적 기억이 선명한 노래다. 노래보다는 떠오르는 풍경들이 더 정겹다. 가난했었다. 그런데 가난한 줄도 모를 정도로 가난이 너무나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철모르고 그저 가난한 거리를 뛰어놀던 아이가 있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다. 말하면 웃는다. 그 시절을 기억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