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 슬픈 인격장애, 무엇이 미친 살인마를 만들었는가
원래 사이코패스란 정신의학적으로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환자를 뜻한다. 정확히 인간이 무리를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한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공격충동을 조절하는 세로토닌까지 부족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행동을 아무런 자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련의 경향, 혹은 그런 사람들을 뜻한다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사이코패스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그것이 죄라는 인지 자체를 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모태구(김재욱 분)(가 사이코패스라는 강권주(장하나 분)의 진단에 그다지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다. 마지막 모태구가 강권주와, 그리고 무진혁(장혁 분)과 나누는 대화에는 분명 자신이 그동안 저지른 행위들이 죄이고 악이라고 하는 자각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들이 평범한 인간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그러나 자기라는 특별한 존재이기에 허락되는 일탈행위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진혁에게까지 자신의 죄의식을 전가시키고 있었다. 무진혁도 같다. 무진혁도 자신과 다르지 않다. 더구나 단지 자기처럼 남들과 다른 특징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강권주에 대해 묘한 공감대와 집착마저 내보이고 있었다. 그는 과연 사이코패스라서 범죄를 저지른 것일까?
그래서 오히려 반사회적 인격장애라기보다는 히스테리성 인격장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사실 히스테리성 인격장애도 반사회적 인격장애와 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차이라면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사회성의 결여로 인한 것이라면 히스테리성 인격장에는 사회성의 과잉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이나 표현들을 보다 과장되게 수단으로서 이용하려 한다. 이를테면 자살소동같은 것인데 자기애게 강한 만큼 실제 자살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위를 통해 타인의 관심을 독점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모태구가 무의식적인 충동으로 강권주와 무진혁에게 자신의 범죄에 대해 알리려 애쓰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인 것도 이와 관계까 있다. 어린시절 자신이 충동적으로 동물과 사람을 해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아버지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더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심대식(백성현 분)의 어쩌면 사소한 모욕에도 참지 못하고 그를 납치하여 살해하려 한 모습도 그 연장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오히려 심대식을 살해하려다 무진혁과 강권주가 살해현장인 별장으로 찾아오니 좋아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애써 무시하는 듯 보이다가도 무진혁과 총을 맞대고 대치하는 상황이 오히려 즐거운 듯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무진혁의 의도를 거스르고자 충동을 억누르고 총을 내려놓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었다. 비서까지 살해하고 도망친 모태구가 자신을 모욕한 강권주를 굳이 찾아가 살해하려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칼까지 들고 건물 옥상에서 강권주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한참을 과시하듯 떠들어대고 있었다. 결국은 아버지 모기범(이도경 분)의 살인을 목격하면서, 더구나 어머니까지 자살하면서 억압된 자아가 그런 식으로 비틀린 채 표출된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살인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저 자신의 충동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와는 달리 살인이 죄라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로 단지 자신의 감정적 목적을 위해 살인이라는 범죄를 이용하려는 유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살인에 대해 인지하고 자신의 범죄를 추적해오는 강권주와 무진혁의 존재에 묘한 쾌감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사이코패스라면 그렇게 자신의 범죄를 알리고 싶어 안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작가가 구성을 허술하게 한 탓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동기가 결국 아버지의 살인이라는 은폐된 범죄라는 것이다. 오히려 살인으로 인해 벌을 받기보다 더 큰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는 더 크고 더 강한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했다. 여기에서 인격장애와 아주 친숙한 단어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나온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아들들은 어머니를 이성으로서 사랑하고 그런 어머니를 독점한 아버지에 대해 질투심과 경쟁심을 느낀다고 한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가 아버지에 의해 자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런 아버지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에게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처음 모태구가 죽인 동물도 어쩌면 모태구 자신을 대신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자라면서도 보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오해려 아버지의 아들이었기에 가장 가까이에서 때로는 직접 관여하기도 했었다. 악은 죄가 아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벌을 받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분노이고 사회를 향한 분노다. 그리고 아버지와 그런 이 사회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으로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했었다. 누군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기도 했었다. 사실이 밝혀지고 잡히게 되면 당연히 벌을 받겠지만 차라리 그 과정에서 누군가 자신을 죽여준다면 더 좋을 수 있겠다. 그래서 미친 것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선명히 느끼고 있기에 더욱 미쳐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를 미치게 만들었는가. 그런 식으로 자기애를, 자기의 상처를 드러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는가.
경찰이 자신을 지킨다. 검찰마저 자신을 지킨다. 의사가, 공무원이, 이 나라의 법과 제도가 자신을 지켜준다. 오히려 경찰에 쫓기는 상황에서도 그런 현재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원망은 없었다. 아들의 처지를 비관하며 안타까워하는 아버지 모기범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세상이 먼저 미쳤고 그래서 모태구도 미쳐야만 살 수 있었다. 타고난 사이코패스였다기보다는 그래야만 했고 그럴 수 있었던 환경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정상으로 자라나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이상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환경에서 그는 정상이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여도 벌받거나 책임지는 일 없이 오히려 더 높은 곳에서 더 큰 힘을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이 사회에서 그는 정상이었던 것이다. 어느 분이 생각난다. 지난부부터 드라마를 보면서 모태구를 보면 떠오르던 어떤 사람이었다. 사이코패스인가, 아니면 단지 그것이 정상인 환경에서 자란 탓인가.
하필 지난주 버스사고의 장면은 세월호의 그것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그들을 내팽개치고 있었다. 경찰과 검찰이 그에 가세하고 있었다. 언론이 그 앞에 무릎꿇고 있었다. 그러니까 묻는 것이다. 무엇이 모태구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과연 미친것은 모태구 한 사람 뿐이었는가. 뒤늦게 먼저 도망쳤다고 경찰과 검찰의 책임은 사라지는 것인가. 그것을 방치한 이 사회의 책임은 지워지는 것인가. 타고난 악당이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쉽다면 세상에 어려울 일이 없다.
극적인 허술함이 군데군데 눈에 뜨인다. 일부러 보지 않았다. 아예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의도에 충실한다. 범인을 쫓는다. 하지만 범인을 쫓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제가 아니었다. 누가 범인인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그를 범인으로 만들었는가. 누가 그를 끔찍한 연쇄살인마로 만들고 여전히 이 사회에 방치하고 있었는가. 하지만 정작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태구보다 더 미친 살인귀가 이 사회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당연한 사실처럼. 입맛이 쓴 이유다. 연출이나 두 주인공의 연기는 그냥 열외로 한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아무래도 다음 시즌을 고려한 듯하다. 복수가 끝난 다음 시즌은 그러면 어떤 내용들로 채워질까. 하지만 무엇보다 그렇다면 범죄자들과 내통해서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경찰 장경학(이해영 분)과 심대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단지 주인공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무진혁과 인간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그들도 살인자였다. 직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어도 간접적인 원인은 제공했었다. 끝끝내 그들은 처벌받지 않고 끝나려는 듯하다. 다시 묻는다. 무엇이 모태구를 만들었는가.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