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터널 - 평범해서 반전이 된 치정살인의 비밀

까칠부 2017. 4. 2. 04:41

박광호(최진혁 분)처럼 나도 낚였다. 30년 전 박광호가 쫓던 연쇄살인사건의 연장이라 생각했었다. 30년 전 원래는 다섯번째였을 피해자를 살해하는데 실패한 범인이 뒤늦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내어 살해한 것이다. 이별범죄라는 것도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도망친 것이 사실이니 그와 관계된 것은 아닐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래서 박광호는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결국 1986년의 박광호가 대신하고 있는 1988년에 태어난 2016년의 박광호가 단서가 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피까지 제법 흘리며 외진 산길을 도망치고 있었다. 어쩌면 두 박광호가 아주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는지 모른다. 약간 안 맞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런 정도야 어떻게든 끼워맞출 수 있는 것이니까. 어찌되었거나 이번 사건의 범인이 30년 전 연쇄살인과 무관하다면 박광호가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잡아야 할 범인 역시 아직 어딘가에 숨어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그리고 아마도 그 순간은 두 박광호가 만나게 되는 그때가 아닐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30년 전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은 아마추어였다. 살인의 프로가 아니다. 사람이 쇼크로 인해 기절했을 때도 일시적으로 호흡이나 맥박이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면 미처 생각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덕분에 살았다. 기도를 강하게 압박해서 호흡이 잠시 멈췄지만 단지 일시적으로 기절한 것에 불과했었다. 그 길로 바로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고 이름까지 바꾸고 객지를 떠돌다가 겨우 한 달 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 터였다. 그리고 30년 전 살인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치정에 얽혀 참혹한 살인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하다하다 어떻게 이런 기구한 운명이 있을 수 있는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할 형제자매도 없고, 그 끔찍한 일을 겪고 도망치듯 떠나 객지를 떠돌다 만난 남편은 어느새 사고로 경제력까지 잃고 말았다. 생계를 책임지며 남편의 수발까지 들다가 이혼하고 겨우 자유로워지려는 순간 인연이 아닌 악연이 그녀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유해마저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하필 그토록 자신을 괴롭힌 남편과 같은 손의 장애가 경멸이 아닌 넋두리처럼 쏘아진 때문이었다. 다시는 그런 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


과연 적응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냥 박광호 자신이 사건을 만나면 아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는 수사바보인 때문이었다. 3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낯설다. 드라마를 보면서 10년 전 자신을 떠올려본다. 혹은 20년 전 자신을 떠올려본다. 당시 상상하던 것보다 너무나 많이 그 이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스마트폰은 어떤  SF에도 나오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그나마 네비게이션은 SF에서 비슷한 것들을 제법 보았었다. 프로파일링도 낯선데 DNA라니. 일부러 발로 뛰어 찾지 않아도 DNA만 있으면 이미 확보한 데이터와 비교하여 당사자의 신원을 확보할 수 있다. 어설프지만 또 너무 호들갑스러워도 지나치게 작위적일 수 있다. 괜한 허세와 그러면서도 비집고 나오는 자만과 그 사이의 괴리로 인한 어색함들. 목소리만큼이나 최진혁의 연기에는 무게감이 있다. 넘어온 시간 그대로 30년 쯤 더 살았다 해도 믿겨질 정도의 묵직함이다.그러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귀엽다.


하여튼 괴짜들만 모아놨다. 몇 년 전 크게 화제를 불러모았던 역시나 수사드라마 '특수사건전담반 TEN'을 떠올리게 한다. 전혀 다른 개성을 가진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장점을 살려 서로 다른 방향에서 사건을 추적하여 마침내 진실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낸다. 뛰어난 탐정은 가장 완벽한 범죄자다. 범죄자의 심리를 쫓는 동안 범죄자의 심리를 닮아간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 범죄자와 같은 기질과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일부러 그를 외부로 발산할 수 있는 탐정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강의내용까지 기괴하기 이를 데 없는 범죄심리학자 신재이(이유영 분)와 그만큼이나 괴상한 경찰대학 출신의 김선재(윤현민 분), 무엇보다 3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마치 현대의 첨단문명 속에 원시인처럼 날뛰는 박광호의 존재까지. 아니 화양서 강력반의 수사관들부터가 범상치 않다. 장의사 아들이라 냄새만 맡아도 시신의 상태를 알아챌 수 있다는 곽태희(김병철 분)의 캐릭터는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도대체 얼마나 괴상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을 만나게 되기에 이런 인물들로만 모아놨는가. 각자의 방식으로 한 걸음씩 더해 이번 사건도 해결해냈다.


30년 전 형사들만이 안다.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 직접 수사에 참가했던 형사들 자신들만이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박광호에게는 당연한 사실이지만 30년 뒤의 형사들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잊혀진 사건에 불과하다. 그것이 단서가 되어 강력팀장 전성식(조희봉 분)은 박광호의 정체를 의심한다. 하긴 생긴 것부터가 너무 30년 전 박광호를 닮았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30년이나 시간을 건너뛰어 미래로, 정확히는 과거에서 현재로 온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일 테지만. 그래도 30년 전의 직접 경험한 지식들이 첨단문명의 사회에서도 제법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술자리에서의 무심한 독백이 그의 정체를 드러나게 한다.


반전과 반전 배신과 배신이었다. 바로 스릴러의 미덕이다. 단서는 함정이다. 주변의 정황이나 증인. 증언들은 단지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제작진이 의도한대로 전혀 엉뚱한 곳을 헤매는 순간 진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