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 - 30년만에 만난 딸, 그리고 멍청한 경찰의 답답함
언제부터인가 마음이라는 단어를 싫어하게 되었다. 열정이라든가 정신이라든가 의지와 같은 모호하고 주관적인 단어들 역시 마찬가지다. 객관적인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 역시 물질로써 존재한다.
원래 이런 답답함은 탐정의 추리를 훼방놓는 무능한 경찰의 몫이었을 것이다. 괜한 선입견으로 사실을 잘못 판단하고는 그것을 고집하느라 진실을 놓치고 상황을 꼬아 놓는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 피곤해지고 심지어 희생자마저 생기는 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다.
너무 정의롭기 때문이다. 너무 정의롭고 인정이 많다 보니 마음이 앞서는 것이다. 범죄를 쫓기보다 악인을 잡으려 한다. 범죄의 진실을 밝히기보다 범인을 잡아 응징하려 한다. 그런데 진실 없이 어떻게 진짜 범인을 잡을 수 있는가. 화내고 다그치고 윽박지르고 여기서 더 나가면 물리력을 동원한다. 때로 경찰이 용의자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겠다고 고문이나 가혹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모두 범인을 잡아 응징해야 한다는 정의감 때문이다. 범인이 누구인가 확신을 가졌기에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어떤 행동도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억지로 받아낸 자백이 진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마음이 아닌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범인의 심리를 꿰뚫고 그를 잡을 방법까지 찾아낼 수 있는 탁월한 심리분석능력을 가지고 있다. 벌써부터 연쇄살인의 피해자 가운데 다른 살인자에 의해 희생되었을지도 모르는 경우를 찾아내고 있었다. 정호영(허성태 분) 말고 다른 살인자가 또다른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정호영이 아닌 다른 범인이 30년 전 기록마저 사라진 연쇄살인사건의 진짜 범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앞선 확신이 그 가능성을 무시했고 진범의 조소 속에 사실을 아는 시청자에게 답답함만 남기고 만다. 진짜 범인은 저기 멀쩡히 경찰을 비웃고 있는데 엉뚱한 곳에서 멍청한 고집으로 그를 방치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때는 주인공인 탐정의 입장에서 경찰의 멍청함에 화부터 내고 있었을 텐데.
결국 신재이(이유영 분)가 박광호(최진혁 분)가 30년 전 두고 온 친딸 박연호였다. 그렇게 아내 신연숙(이시아 분)이 사고로 목숨을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딸 박연호가 영국에 입양갔다가 공부까지 마치고 신재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화양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었다. 하긴 반전이라기에는 신재이가 가지고 있던 호루라기의 존재가 너무 노골적이었다. 신연숙이 박광호에게 선물했던 것을 박광호가 사라지고 유품으로 간직하고 있다가 어린 딸 박연호의 목에 걸려있는 것을 시청자 역시 보아왔던 터였다. 비밀은 멀리 감추지 않는다는 일종의 법칙과 같은 것도 있다. 하필 신재이가 정호영을 잡겠다고 스스로 미끼가 되기로 결심한 그날 김선재(윤현민 분)의 부탁을 받고 박연호의 행방을 쫓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재이가 박연호다. 마침 정호영이 신재이를 납치하여 살해하려는 순간이었다. 신재이가 호루라기를 불어 박광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사실 상당히 무리한 설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미끼가 되려 하면 범인을 잡을 수단 역시 확보해두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 바늘도 없이 실에 미끼만 매다는 경우는 없다. 통발도 없이 미끼만 던져 놓으면 그 미끼만 먹고 물고기는 도망치는 것도 아닌 그저 유유히 헤엄쳐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범인 정호영을 유인하는데 정호영이 나타나도 제압할 수단이 없으면 어쩌려는가. 당장 정호영이 신재이를 납치했을 때도 신재이는 제압하기는 커녕 정호영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도 버거워하고 잇었다. 하지만 박광호는 신재이와 만나야 했고 신재이를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했으니까. 박광호는 아빠였고 신재이는 딸이었다.
어쩌면 또다른 비밀이 감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착하기만 한 여자는 아니었다. 나쁜 여자였다. 최소한 죽임을 당할만한 잘못이 희생자들에게는 있었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떠올리게 된다. 여성에 대한 증오다. 특정한 여성에 대한 증오를 불특정한 여성 일반에게 투사한다. 여자가 잘못된 것이다. 여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모든 혐오에는 이유가 있다. 자기가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해야 할 너무나 당연한 이유들이다. 피해자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이 있다. 용서해서는 안되는 죄가 있다. 하지만 대개는 사소한 것들이다. 단지 그저 자신을 정당화할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범인과의 머리싸움조차 아니다. 진범 목진우(김민상 분)도 그다지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굳이 애쓰거나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단서까지 던져주는데 선입견에 사로잡힌 경찰이 일부러 그것을 무시하는 중이다. 시청자 만큼이나 진범 목진우도 답답하다. 머리싸움을 할 여지조차 없다. 아예 나잡아가라 그 앞에 자수까지 해도 장난하지 말라고 웃어넘길 기세다. 아예 다른 가능성은 듣지도 않는다. 아예 귀를 막은 채 한 가지 가능성만을 쫓는다. 정호영도 연쇄살인범이 맞으니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웃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찡그리지도 못한다. 자신의 범죄를 알지 못하니 잡히지는 않겠지만 영영 자기가 한 것임을 알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차라리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주인공이고 뭐고 없었다. 살인현장이 참혹했던 만큼 진범을 일부러 놓치는 경찰이 답답했다. 피해자를 동정하는 만큼 진범을 놔두고 엉뚱한 곳을 뒤지는 경찰들에 살의마저 느꼈다. 그 맨 앞에 박광호가 있었다. 멍청한 게 의욕만 앞서서 쓸데없이 헛발짓만 한다.
가족드라마가 되었다. 어쩌면 장르를 뒤집은 것인지 모른다. 탐정이 아닌 무능한 경찰의 입장이 되어 본다. 30년만에 30년 전 남겨두고 떠나온 딸과 만난다. 벌써 자신과 비슷한 또래가 되어 버린 딸을 떠나온 그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러면 신재이는 그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러고보면 전성식(조희봉 분) 30년 전에나 막내지 박광호가 살았던 시간만큼 경찰로써 커리어를 쌓아왔을 터다. 확실히 어느 순간부터 전성식이 진짜 팀장이 되어 박광호의 상사로써 그를 부리고 있었다. 꾸짖는 모습에서 카리스마까지 느껴진다.
어쩌면 호루라기가 열쇠일지 모르겠다. 딸을 만났다. 딸을 만나러 미래까지 왔다. 마침내 범인의 정체를 밝혀낸다. 아직은 주변만 맴돌고 있다. 진실의 앞에 있다. 마음이 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