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 - 사방팔방 쓸데없이 깊고 진지하고 유쾌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사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란에 모두 종군한 이를 찾자면 한 사람 더 있다. 바로 사야가 김충선이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로 조선에 상륙해서 아마 이듬해 조선에 항복하여 일본군의 무기와 전술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한편 실제 조선군에 종군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 공으로 선조로부터 이름과 벼슬을 받은 뒤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에까지 참전해서 상당항 공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알쓸신잡'식의 그냥 곁가지 이야기다.
아무튼 신선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전란을 모두 겪은 인물이라서가 아니었다. 젊었을 적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의병을 일으켜서 참전했고, 늙어서는 관직에 있다가 왕이 남한산성에 포위된 것을 알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참전하여 목숨을 잃었다. 참고로 유시민 작가는 최진립 장군을 의병이라 표현했는데 정확히 임진왜란 도중인 1594년까지만 의병이었다. 원래 어느 정도 전쟁초반의 혼란이 수습되고 조정의 체계가 잡히기 시작한 뒤로는 의병들도 거의 관군으로 편입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최진립 역시 무과를 보아 관직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인조가 즉위한 뒤 공조참판이 되었고 이후 경기수사와 삼도수군통제사, 전라수사까지 지냈었다. 용인 험천에서 전사할 때도 공주영장의 신분으로 군사를 이끌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 역시 중요한 것은 아니고, 그때 최진립과 함께 죽은 노비가 있었는데 그들의 제사를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지내고 있었다니.
하긴 원래 유교라는 자체가 인본주의적인 사상이었다. 공자 자신의 출신도 그랬기에 신분에 대한 차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정확히 신분이라기보다는 직역이었다. 임금이라는 역할이었고 신하라고 하는 책임이었다. 아버지라는 지위였고 아들이라는 책임이었다. 그것은 위로는 왕에서부터 아래로는 사람취급 못받던 노비라도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사대부란 그런 평범한 무지렁이들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기에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이들이었다. 아무리 신분질서로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조선후기에 이르러 무려 2만 여 개에 이르는 서당이 만들어지며 상민의 자식들까지 유교의 도덕과 교양을 배우게 된 것도 그런 영향이었다. 애초부터 조선초 '삼강행실도' 등 유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을 도해까지 넣어 정음으로 출판한 것도 모두 이들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에서였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집안 노비가 유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여 선조의 명예까지 드높였으니 후손들이 보기에 어떠했을까? 오히려 최부자의 집안이 유교의 가르침의 본질에 가깝고 그를 비웃던 사대부들이란 유교의 본질을 잃은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양반들일 뿐이었다.
신하는 자신의 임금에게 충성을 다한다. 노비는 자신의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래서 하필 그 이름도 충노다. 전하는 말도 나라와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주인을 위해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다지 그 배경 자체는 지금 기준으로 썩 납득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금이 임급답고 신하가 신하답듯 노비가 노비다왔으면 주인은 주인으로서 자신의 도리를 다한다. 노비로서 자신의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면 주인은 마땅히 그 공을 잊지 않고 수백년이 지나도록 기억하고 기려준다. 원래 충성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충성을 받을 자격이 있을 때 기꺼이 충성을 바치는 것이었다. 아마 유시민이 뭉클한 것을 느꼈다면 바로 이 점이지 않았을까. 노비로부터 그 할 도리를 받았기에 주인으로서 그 도리를 지금까지도 다하려 한다. 지금 우리가 잊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어떤 것이다.
정재승 박사의 만국박람회 이야기는 무척 신선했었다. 역시 엑스포보다는 만국박람회다. 무언가 굉장히 거창하고 즐겁고 신기한 이름이다. 아주 오래전 서울에서 열렸던 만국박람회를 관람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없는 살림에 아껴 건네준 돈으로 동생을 데리고 아마 여의도에 있었던 만국박람회장을 찾았었던 것 같다. 여기저기서 하나라도 더 많은 기념품을 받으려 뙤약볕에서 악다구니를 썼던 기억이 있다. 동생은 무척 피곤해하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고 매점에서 사먹은 포장마차 한 그릇과 가득한 전리품이 그 시간들의 증거였다. 언제 어디서 시작했고, 그래서 어떻게 발전되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것들이 새롭게 세상에 소개되었고. 특히 아이스콘과 핫도그는 일상적이면서도 가장 직접적인 그 증거가 되고 있었다. 핸드폰에 대해서도 가장 먼저 소개된 것이 1970년대 어느 만국박람회에서였다. 그러니까 유희열의 말처럼 이 나이가 되어서 어렸을 적 '소년중앙'을 다시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야말로 기억의 만국박람회라고나 할까?
진지한 이야기들도 있었다. 특히 동물원과 관련해서. 그러고보면 동물원 우리에 갇힌 동물들이 안쓰러워 동물원 자체를 가지 않은지가 꽤 되었다. 어딘가 아파 보였었다. 힘이 없어 보였고. 어느 만화가가 사람이 우리에 갇혀 있고 동물들이 구경하는 모습으로 풍자하기도 했었지만 사실 역사에서 실제 있었던 풍경들이기도 했었다. 박물관과 동물원은 역사와 자연에 대한 포로수용소다. 유시민 작가의 지적에 동의한다. 새들이 자연스럽게 날고 사람의 어깨에 내려와 앉는 동궁원의 모습은 그런 점에서 무척 신기했었다. 처음으로 한 번 새들을 보러 그 먼 길을 찾아가고픈 충동같은 것을 느꼈다.
원자력은 과연 안전한가. 물론 지금까지 크게 문제가 될만한 사고라고 해봐야 유시민이 언급한 세 개 정도가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세 개 모두가 치명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너무나 큰 참사와 후유증을 낳고 있었다. 만에 하나다. 진짜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최악의 가능성까지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한두사람이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대도시 근처에 원자력발전소가 있으면 그 피해는 단위부터가 달라진다. 방사성폐기물의 처리와 사용이 끝난 원자로의 폐로에 들어가는 비용과 그로 인한 환경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그럼에도 당장 천연가스나 재생에너지로 그 전기생산을 대체하려면 비용문제가 걸린다. 물론 정치적인 토론이 아닌 교양수준의 대화다. 적절한 비판과 대안과 그리고 고민들의 교환이다.
황교익의 롤을 찾은 것 같다. 전반적으로 다섯 출연자의 역할이 적절히 나뉘어지고 있다. 유희열의 진행은 자연스러우면서 노골화되고, 황교익은 인문학의 김영하나 자연과학의 정재승, 정치사회학의 유시민과 다른 전통문화라는 자신만의 장점을 찾게 되었다. 어쩌면 의도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전문분야인 음식과 더불어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다감하고 섬세한 이해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감은사지 석탑에 대한 평가 만큼이나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음식문화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도대체 쑥과 마늘만 먹으며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기에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한 시련으로 설정한 것일까. 원래는 밤도 구황작물이었고 메밀을 제외한 옥수수나 감자 등 대부분의 구황작물이 조선 이후에나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면 농업기술도 떨어지는 더 오래전에는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살았었을까? 마늘이 아닌 달래가 가정했을 때 딱 그것들을 캐 먹기 시작할 무렵이 춘궁기 때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곰이 그 시련을 견디고서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모든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를 만든 사람의 경험과 감정과 사유가 담겨 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말을 모두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다. 아, 대중음악 박물관도 있었다. 윤심덕의 죽음과 관련한 음모론은 나 역시 오래전 들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원래는 유희열의 전문분야였을 텐데. 참 주제가 어느새 빨리도 넘어가고 만다. 그나마 구경하는 입장이라 사방팔방으로 뻗치려는 이야기를 스스로 자제할 수 있다. 사랑도 자아도 불확실하기에 확실한 바위에 그것을 새겨 남기려 한다. 유시민이 말한다. 죽고 나서 잠시라도 노을처럼 여운을 남길 수 있으면. 오늘의 주제다. 천년고도 경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