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비밀의 숲 - 대단원, 괴물 이창중의 마지막 대사 '쫌 천천히 오지?'

까칠부 2017. 7. 31. 08:15

참 멋진 대사라 생각한다.


"쫌 천천히 오지?"


원래 사람이 자살하는 것은 더이상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다. 삶이 죽음보다 더 무섭고 고통스럽기에 차라리 더 편한 죽음을 선택한다.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한 순간이라도 더 살고 싶었다. 더 살아서 내리쬐는 햇살을, 바람을, 자신이 지금 딛고 선 이 순간들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좋았던 일도, 기뻤던 일도, 후회하는 모든 일들까지. 그러나 자신이 살아서는 안되었다.


바로 이런 때야 말로 '죽을 용기'라는 상투적인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되는 것이었다. 남들처럼 고개돌려 외면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랬다면 여전히 청와대 수석으로, 한조그룹의 사위로,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의 남편이자 아버지로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바로 조금 전까지 자신이 누리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일없었으면 앞으로도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누릴 수 있었을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긴 그 또한 삶에 대한 두려움이었는지 모른다. 그것이야 말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양심을 배신한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더이상 자신 앞에서 존엄하지도 당당하지도 못하다. 혹시라도 누가 알까. 누구에게 들키지는 않을까. 그러나 자신이 이미 안다. 이미 자신에게 모두 들켰다. 아직 생생한 자신의 양심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살이야 말로 존엄사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직 자신이 견딜 수 있을 때 존엄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가장 비참한 처지로 전락한 노숙자 가운데 의외로 자살자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아직은 살만해서가 아니라 죽음조차 이미 포기해 버린 때문이다.


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한 순간이라도 더. 그러나 살 수 없었다. 자신은 죽어야 했다. 죽어야만 오로지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었다. 이창준(유재명 분)이 남긴 유서는 검사로서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마지막 존엄이었다. 자신은 검사로서 악을 응징하려 한다. 사회의 숨은 거대한 죄를 밝혀서 단죄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죄인으로 죽어야만 했다. 살아서 증거들을 검찰에 넘겼다면 자신은 단지 배신자가 될 뿐이었다. 살아서 죄인의 모습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된다면 언론과 여론은 단지 그런 자신의 존재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황시목(조승우 분)의 입을 빌어 어째서 이창준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어야 했는가 설명해준다. 이창준 자신이 극악한 죄인이 되어 죽음으로써 이창준이 남긴 자료들은 그의 범죄를 입증할 증거가 될 수 있었다. 황시목을 비롯한 후배검사들이 자신을 수사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이 남긴 증거들을 수사할 빌미를 쥐어 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황시목과 후배검사들이 자신의 사명과 의지를 물려받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박무성을 살해하고 김가영을 납치했던 것처럼 자신의 의지를 위해 스스로를 죽인다. 자신이 살아있으면 자신이 목적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이 자신으로 인해 가려져 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이창준의 희생으로 자칫 묻힐 뻔했던 사회의 거대한 악이 세상에 드러나고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창준의 선택은 숭고한 희생일 수 있는가. 단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기에 그리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황시목은 이창준을 괴물이라 부르고 있었다. 만일 정상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해 그 모든 수사들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검사로서 자신들이 지키고자 했던 범과 정의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 아래 정상적으로 지켜질 수 있었더라면. 이창준이 마지막 뱉은 한 마디는 바로 그것을 가리킨 것일 수도 있다. 살고 싶었다.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죽어야만 했다. 누가? 왜? 무엇을? 어떻게? 어쩌면 복수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그들에 대한 복수. 자신을 이렇게 절박한 죽음으로 몰아간 세상에 대한 복수. 참 많은 것을 그 한 마디 대사와 이창준의 표정을 통해 보여준다. 개인의 선과 정의가 사회의 악과 불의에 꺾이는 모습이다. 자신이 자신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창준이야 말로 드라마의 주제를 담아내는 실질적인 중심이었을 것이다. 황시목은 이창준의 의지였다. 차라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다.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주어지면서 단지 유전자만이 아닌 자신의 의지를 누군가를 통해 물려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몸은 죽고 후손까지 모두 사라지고 난 뒤라도 의지만 계속 사라지지 않고 이어진자면 영원히 살아 있는 것과 같다. 이창준이 남긴 사명은 검사로서 법과 정의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악과 죄를 밝히고 처벌하라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황시목을 선택했다. 그에게 사명과 책임을 물려주었다. 그가 자유롭게 의지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까지 만들어주었다. 강원철(박성근 분) 검사장도 사실은 이창준의 배려였다. 서동재(이준혁 분)는 자신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황시목이 의지를 물려받았다면 서동재는 직접적인 유언을 듣는다. 의지를 물려받은 자와 말을 물려받은 자, 이창준에게는 서동재마저 깨물어 아픈 손가락이 아니었을까. 진정으로 검찰이라는 조직을 아끼고 사랑했다면.


황시목이 마지막 순간 이창준의 의지를 부정한 것이야 말로 이창준의 의지를 바로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는 이창준과 같은 불행한 검사가 나타나서는 안된다. 이창준과 같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검사가 생겨나서는 안된다. 이창준을 부정하고 극복함으로써 오히려 황시목은 이창준의 의지를 계승한다. 이창준과 다른 방식으로. 이창준이 꿈꾸었던, 그러나 그는 할 수 없었던 그만의 방식으로. 어리석은 서동재는 여전히 반성을 모르고 예전에 하던 그대로 살고 있는 중이다. 서동재도 이창준의 유언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정한다. 의지를 물려받지 않고 유언조차 철저히 부정한다. 이후의 이야기가 있을까? 있기를 바라지만.


한여진(배두나 분)과 황시목의 관계가 참 미묘하다. 친구일까? 단순한 인간적 연민과 유대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감정일까? 이창준이 아버지라면 한여진은 황시목에게 어머니와 같다.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믿었던 자신의 감정을 자꾸만 일깨우게 만든다. 마침내 웃음도 지을 수 있었다. 많은 남성에게 여성이란 어머니의 대신이기도 하다. 마음으로 크게 한여진의 존재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면 한여진에게 황시목이란 어떤 존재일까? 아직 상상할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은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 미묘한 채로 흘려보내듯 보여준다. 사랑도 좋고, 친구도 좋고, 모성이든 뭐든 상관없다. 사람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서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더이상 황시목도 혼자만의 정의를 쫓는 독불장군이 아니다.


어차피 현실을 반영한다면 모두를 후련케 할 깔끔한 마무리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한조그룹과 같은 대기업의 총수가 법의 처벌을 받을 일도, 처벌을 받더라도 실형을 모두 살고 사회의 주변으로 전락할 일도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수사를 진두지휘한 황시목이 좌천당한다. 그렇다고 좌절이나 패배는 아니다. 황시목만 좌천당했을 뿐 그밖에 한여진이나 장건이나 김정본이나 살인피해자인 박무성의 아들 박경완까지 나름대로 잘 풀리고 잘 살아가고 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지만 이윤범(이경영 분)도 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았다. 검찰에 출두하며 이윤범이 내뱉은 변명들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철저히 조롱한다. 그들을 완전히 사회에서 배제할 수는 없지만 웃음거리로는 만들 수 있다. 조금은 한심하기도 하다. 그런 큰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대중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 정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디인가.


해야 할 이야기는 거의 마무리한 듯 보인다. 굳이 불필요한 사족은 최대한 줄이고 건조할 정도로 간결하게 현실적이면서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고 끝냈다. 다만 어차피 검찰이나 경찰이 드라마에서처럼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기란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꿈은 꿈으로 현실은 현실로. 드라마란 그래서 또한 판타지인 것이니. 긴 꿈에서 깨어난 듯하다. 잠에 취해 꿈을 더듬는다. 최고의 드라마다.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