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배달꾼 - 고경표는 돈내고 출연해야...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게 되는 첫번째는,
"채수빈 예쁘다!"
그리고 그 다음에 느끼는 것은,
"채수빈 사랑스럽다!"
그리고 마지막에 느끼는 감정은,
"고경표 너는 돈내고 출연해야겠다!"
드라마가 처음 의도했던 주제같은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최강수(고경표 분)의 캐릭터도 너무 직선이라 다른 여지가 없어 그다지 흥미가 일지 않고. 오진규(김선호 분)는 너무 개새끼라서 아예 꼴보기도 싫다. 이번회에서는 조금 사람다워지기는 했다만. 전통식당가 사람들과 거대자본과의 대립도 이제는 조금 식상할까? 그에 비하면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채수빈의 이 미친 듯한 매력은 무엇인가.
억척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군데군데 보이는 맹함이 미친 듯 사랑스럽다. 세상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정작 세상을 다 알지는 못한다. 오히려 서툴기조차 하다. 그런 어수룩한 빈틈이 자신이 가진 미모와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채수빈에게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다. 화려함보다는 수수함이 어울린다. 물론 그다지 많은 작품을 보았던 것은 아니니 자신은 못한다.
오진규에게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악의에 익숙했다. 세상의 악에 더 익숙했다. 그것이 실제이며 현실이라 그렇기 배우고 겪고 믿으며 살아왔었다. 어차피 세상에 좋은 놈은 없다. 착하기만 한 놈도 없다. 그러니까 모두는 악하게 서로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지은 만큼 대가를 치렀는데 뭐가 잘못인가.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더이상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릴 테니까. 망망대해의 무인도를 표류하는 듯 어디로 가야 할 지 갈 수는 있을지 절망적인 혼란 속에 그렇게라도 버텨야만 했다. 이솝은 여기서도 위력을 발휘하는가. 결국 쇠파이프보다는 할머니의 따뜻한 위로였다.
다행이다. 사람이 죽지 않다.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깨어나기까지 했다. 자기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자기로 인해 사람이 죽지 않았다. 이 사람들을 슬프게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기도 힘들었는데. 자기도 아팠는데. 그래서 누군가 위로해주기를 기대했는데. 세상에 단 한 사람 부모도 몰라주는 자신은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선의이고 따뜻함이었을까? 그러고보면 오진규가 이단아(채수빈 분)에게 집착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알에서 깨어 처음 보는 상대를 어미라 여기며 따르는 새끼새처럼.
역시 느끼는 것은 드라마는 액션이라는 것이다. 몸으로 치고받는 것만이 액션이 아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액션이다. 술에 취해 해롱거리는 것도 액션이다. 등에 업혀 되도 않는 주정을 해대는 것도 액션이다. 그래서 이단아는 드라마의 중심에 있다. 가장 크고 중요한 액션들은 이단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편견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만큼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름다운 것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도대체 애초 의도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언제부터 시작되려는지 아직 깜깜무소식이다. 괜한 오진규와의 투탁거림과 시작도 하지 않은 이지윤(고원희 분)과 이단아의 삼각관계로 지금까지 대부분의 분량을 채우고 있었다. 이단아와 최강수의 관계가 급진전된다. 이지윤은 여전히 그 주위에 머물러 있다. 남의 울고 웃는 사랑이야기가 가장 재미있기는 하다. 보기 즐거우니 되었다. 심각해지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