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명불허전 - 허임의 진실, 의사 아닌 인간의 양심

까칠부 2017. 9. 4. 09:36

그러니까 개인의 선이 사회적 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개인의 악과 사회의 악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군사독재정권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는 이들을 밀고하고 체포하여 고문하는 것은 나라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애국적인 행동이었다. 당연히 민주화를 하겠다며 나라의 질서를 흐트리고 정부를 위협하는 운동권의 존재는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빨갱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인사들은 쫓겨다녔고 애국적인 경찰과 시민들이 그들을 뒤쫓아 법의 처벌을 받도록 만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 말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같은 민족을 배반한 조선인들이 어쩌면 일본인들보다 더 나쁘다. 어차피 일본인들에게 조선이란 남의 나라이고 조선인들 역시 남의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그 민족을 약탈하는 것이 물론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자기 민족을 배반한 것보다 더 나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친일파들이 어째서 민족을 배반하게 되었는가. 독립운동가들이란 일본이 구축한 질서를 흐트리는 폭도이고 반역자들이었다. 당연히 일본의 정의는 그같은 독립운동가들을 범죄자로써 일본의 법으로 처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일본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는 많은 배려를 베풀고 있었다. 일본을 따르는 것이 선이다. 일본의 지배에 복종하는 것이 정의다. 그래도 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권장되고 있었다. 확실한 대가까지 따르고 있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없었다면 친일파도 없었다. 선후가 바뀐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좋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의사 자신의 양심이 아닌 외부의 압력에 의해 환자를 살릴지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같은 환자라도 살려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려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다. 살리지 못해서 죄가 되기도 하지만 살려서 죄가 되기도 한다. 그런 때 의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나마 권력이 강제하는 것이면 낫다. 세상의 관념이, 인습이 그러도록 강요한다면 의사는 어떻게 자신의 양심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그 양심이란 것이 우리가 아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인가? 


하나의 정의와 질서가 바뀌는 것을 흔히들 혁명이라 부른다. 쉽지 않기에 혁명이다. 그만큼 어렵고 기적과도 같은 일이기에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혁명을 위해서는 수많은 피가 역사 위에 뿌려지게 된다. 남의 피가 흐르는 것은 어쩌면 상관없다. 그러나 그 위에 나의 피도 함께 뿌려야 하는 것이다. 비겁한 것은 죄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비겁하다. 용감한 자들은 죽는다. 가장 앞장서서 나선 이들은 가장 먼저 죽는다. 마지막까지 뒤에 남은 이들이 살아남아 결국 후손을 남기고 역사를 이어간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다. 정의롭기는 오히려 쉽다. 정의롭게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의사의 양심을 저버리고 환자를 차별하는 허임(김남길 분)이 인간으로서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을 살리는 것은 의원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권력자다. 아무리 자기가 모든 수단을 다해서 살려도 권력자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만으로 사람은 다시 죽을 수 있다. 심지어 자신마저 그 권력자에 의해 죄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 살기 위해서는 어째야 하는가? 체념이다. 자포자기다. 자기 나름의 반항이다. 그러니까 철저히 자신의 의술을 자신의 부와 출세를 위해서만 쓰겠다. 세상이 바라는대로 타락해 주겠다. 세상이 시키는대로 더러워지겠다. 그래서 겨우 시간을 넘어 진정한 의사의 마음을 되찾아왔는데 다시 현실은 이 모양이다. 자기가 살렸기에 환자는 죽었고, 환자를 살리려 한 형제마저 죽임을 당하려 하고 있었다. 살리는 것이 선인가? 죽도록 방치하는 것이 정의인가? 최연경(김아중 분)이 그것을 담넘어로 훔쳐본다.


사실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시간여행을 하는 드라마야 의외로 흔하다. 그러면서 유치하지 않게 일정한 수준의 완성도를 보이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다. 그냥 가벼운 코미디드라마이겠거니. 김남길과 김아중이 출연하니 꽤나 보기 좋은 그럴싸한 로맨틱코미디가 되지 않을까. 의사로서 오로지 환자를 살려야만 한다는 명제 역시 의학드라마라면 항상 나오는 것이라 식상하기조차 하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시간을 거스르고 건너뛰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야 했던 이유였다. 500년 전의 400년 전의 조선과 현대의 서로 다른 현실이 어떻게 인간을 바꾸고 따라서 그 안에서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보편의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조선에서도 허임은 자신의 목숨까지 걸어가며 모든 환자를 가리지 말고 살려야만 하는 것인가.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이 살렸다는 이유로 환자가 죽고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역시나 허준(엄효섭 분) 또한 시간여행자였었다. 아마도 시간여행을 가능케 하는 매개는 허임이 가지고 있는 침통일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 침통은 허준이 과거 현대로 넘어오며 썼던 그 침통일 것이다. 흥미롭다면 침통이 매개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거의 비례해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허준과 최연경 사이에도 알려지지 않은 어떤 감춰진 사연이 있다. 그것은 할아버지인 최천술(윤주상 분)과 신혜한방병원장 마성태(김명곤 분)과도 관련된 어떤 것일 터다. 그리고 궁금증도 많지만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허임과 최연경 사이에 남은 이야기도 흥미를 잡아끈다. 허임이 조선에 남는다면 현대의 최연경은 과연 어떻게 될까?


아마 가장 충격적이면서 결정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상대의 숨겨진 진실을 보았다. 세상에 더럽혀진 이면의 순수한 본질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최연경 차례다. 그녀가 감추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본질은 무엇일까? 결국은 로맨스 드라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 이상을 담아내기도 한다. 두 남녀가 서로 오해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더 심오한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 의사로서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양심에 대해서. 세상의 선과 정의와 윤리에 대해서. 사소한 것들은 단호히 생략하는 과감함도 있다. 필요한 것만 남긴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