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르곤 - 어느 방송국의 현실을 떠올리며

까칠부 2017. 9. 19. 09:19

하필 지금 한창 파업중인 어느 방송사의 사정을 떠올리게 만드는 탓에. 사실 처음에는 그다지 기대같은 것이 없었다. 김주혁(김백진 역)에 대한 호감이 없었다. 천우희(이연화 역) 역시 전형적인 미인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차라리 채수빈 역할의 신현빈이 내 취향에 더 가까웠다. 뭔가 엉성하고 허술한 느낌에 굳이 내 시간 써가며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 순간 이연화가 회사에서 내쫓긴 기자들을 대신해서 들어온 시용기자라는 사실에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이거 재미있겠다.


확실히 정권이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그동안 넘쳐났던 것이 부패한 검찰에 대한 고발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조작'에서 불의한 권력과 결탁한 언론의 타락이었다. 바로 맞물려서 이번에는 언론 그 자체를 다룬다. 어차피 정권도 바뀌었겠다 권력에 의한 언론장악보다 보다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려는 듯하다. 어떻게 권력은 그렇게 쉽게 언론을 길들이고 자기 지배아래 둘 수 있었던 것인가. 욕망에 약하고 인정에 약하고 그래서 관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간의 군상이 그 실상을 폭로하는 듯하다. 언론인의 양심이나 사명따위 아랑곳없이 눈앞의 이익만을 쫓는 사용자와 경영진과 임원들의 행태와 어쩔 수 없이 그에 굴복하는 소시민적인 모습들이 그나마 언론의 양심을 지키던 '아르곤'을 방송의 주변으로 내몬다.


얼마나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가가 아니다. 특종조차도 최소한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HBC에서는 크게 의미가 없다. 누가 더 인사권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주변의 실력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 있는가. 그러면서 필요하다면 아랫사람들에게도 적당히 베풀고 배려하는 인정을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힘이 된다. 언론인으로서 대단한 실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남다른 실적을 올려서도 아니다. 그런 것은 어쩌면 인간관계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보다는 욕망이다. 내가 가진 거래가능한 욕망을 어떻게 관리하고 유지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흔히 처세술이라 부른다. 한 마디로 방송국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런 기회주의자들이 출세하고 높은 자리에서 힘을 갖는다. 누가 더 비열하고 교활하게 그 기회를 부여잡는가에 따라 방송국에서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아르곤'이 탐사취재해서 밝혀낸 많은 진실들마저 그 앞에서는 의미를 잃는다.


그러니까 어쩌다 대한민국의 거의 대부분의 이런 지경에까지 놓이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몇 문장 안되는 트위터조차 자기가 직접 번역해보려는 노력과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영어사전만 하나 있어도, 아니 그냥 대충 인터넷만 몇 번 검색해도 중학교 수준의 영어실력이면 충분히 번역할 수 있는 내용의 문장들이었다. 물론 언론이 굳이 중립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니 언론은 편향적인 것이 맞다. 정의란 자체가 평향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오롯한 정의는 배타적이고 비타협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껏 자신들이 추구하던 이념마저 뒤로하고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일방적으로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바로 재벌을 비판하던 언론이 재벌의 임원에게 구걸하는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광고는 돈이 되고 언론사의 수입은 곧 자신의 수입과 직결된다. 많은 언론인들이 정치인과 유착하여 정치의 길을 걷기도 한다. 김백진도 아마 그래서 은퇴하려는 선배 최근화(이경영 분)에게 그 점을 묻고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너무나 흔하고 뻔한 정치권력을 배제함으로써 이야기는 더 깊이 언론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다. 하긴 tvn은 언론이라기에는 오락전문채널이었을 것이다. 보도기능이 없다. 그래서 언론에 대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굳이 기성의 언론을 겸한 방송사들처럼 자기변명에 시간과 노력을 할애할 필요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의 본성이 가지는 구조적인 문제인지 모른다. 너무 사람 사는 곳 같다. 당연히 사람 사는 곳이면 일어날 일들이 방송국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정의와도 진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사람이라고 원래 그런 것이라고 내버려둔다면 세상에 정의니 진실이니 하는 것은 남아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에 비하면 아내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딸의 신용도 얻지 못하면서 주변으로부터도 냉혹한 비판을 받는 김백진은 인간으로서 실격에 더 가깝다. 희생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한 편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캐릭터는 주인공인 김백진이나 이연화가 아닌 조역인 허종태(조현철 분)이었다. 그야말로 개인의 욕망과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 사이의 경계에 위치한 듯한 인물이다. 그가 특종을 취재하려 발벗고 나서는 것은 차라리 동물이 먹이를 찾는 본능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자기 이름으로 기사를 내고 싶다. 자기 이름으로 된 기사를 내서 모두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오히려 이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 기자가 사실을 취재하고 진실을 밝혀 모두로부터 인정받는다.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회로 삼아 더 큰 부와 명예, 권력까지 손에 넣는다. 아직은 그렇게까지는 아니다. 아버지가 워낙 유력한 정치인이다보니 이연화에 대해 그다지 절박함이라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상당히 느긋하다. 그래서 더 돋보인다. 배부른 육식동물이 본능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그 기계적 본능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이 기자 아니던가. 기자의 욕망이란 원래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았는가. 세속적 욕망이 기자의 사명과 그렇게 조화를 이루게 된다.


건조하지만 로맨스라 할 만한 것도 있다. 때로 조금 시리고 아린 듯한 이야기도 더해진다. 시용기자라는 절박함이 때때로 이연화를 옭죄고 잔인하게 할퀴고 지나간다. 회사에 의해 해고된 기자들과 그 기자들의 동료와 그를 대신해 들어온 대체인력 사이의 갈등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인간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인간이 만드는 모순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 사회의 진실은 어디 있는가. 언론의 정의와 사명은 또한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언론이 만들어가는 우리의 현실 역시. 다만 너무 에피소드 위주라 가벼운 느낌이 있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