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 같은 경험 다른 기억 마주보는 현실

까칠부 2017. 12. 13. 10:17

감당할 수 없는 불운이나 불행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로 반응한다. 원인을 남에게 돌리거나 이유를 자기에게서 찾거나. 그래서 더 타인에게 기대거나 아니면 더욱 더 혼자가 되려 하거나.


참 절묘하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사고를 당한 이후가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은 구조대원들이 먼저 찾아와서 구해냈고, 다른 한 사람은 혼자서 구조받기 위해 상처입은 다리를 끌고 폐허속을 기어야만 했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대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가 기대기를 바라야 했다. 착해서만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도 하문수(원진아 분) 그때처럼 혼자 고립된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이강두(이준호 분)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주위를 밀어내려 애쓰는 것 역시 혼자가 되기 싫은 발버둥인 것이다. 남겨지기 싫다. 버려직기 싫다. 희망을 가졌었다. 날 찾아낼 것이다. 날 구해줄 것이다. 차라리 그런 기대가 없었더라면. 그런 섣부른 바람과 희망에 기대지 않았더라면. 그저 아들 상만(김강현 분)을 오냐오냐 위해주는 엄마의 모습을 부러운 듯 훔쳐본다. 갑자기 허기가 진 듯 있는대로 밥을 퍼서 입에 집어넣더니 더 달라고 내민다. 동생이 자기에게 기대주기를 바라지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절망이란 어떤 것일까? 버티는 것 뿐이다. 그저 악착같이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오기다. 그마저 없다면 바로 무너지고 말 것 같다.


미안하다는 말도 싫을 때가 있다. 저 혼자서 미안하고 끝내려는 것 같다. 이제 모두 지난 일인 양 혼자서 미안해하며 끝내려 하고 있다. 이강두가 추모비를 부순 이유다. 자기에게는 아직 현재인데.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의 현실인데. 그렇게 알량한 비문 속에 그 모든 비극이 박제화되어 버린다. 이만하면 충분히 미안해했고 대가도 치렀으니 이제 과거라는 액자 속에 넣어두려 한다. 너는 미안해하지만 나는 고통스럽다. 너는 죄스럽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도 고통속에 살고 있다. 매 순간 떠오른다. 그 순간의 기억들이.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하는 그 참혹했던 상황들이. 그런데 누구 마음대로 이미 끝난 일로 기념하려 하는가.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슬픈 것이다. 살기 위해 상처주고, 그렇게 서로 상처주며 상처입고. 상처로 상처를 보듬으려면 상처는 덧날 뿐이다. 날선 가시처럼 상처를 곧추세우면 서로 상처에서 더 많은 피가 흐를 뿐이다. 아내가 남편을 원망하고, 남편은 그런 아내를 감당못하고, 딸은 죄책감에 그것을 끝끝내 홀로 견디려 한다. 차라리 엄마가 자기에게 기대고 있었으니까. 자기만을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형식으로나마 가족이 유지되고 있으니까. 불길하다. 술에 의지해 하루가 멀다고 사고를 치던 엄마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남편이 이혼서류를 보내왔다. 과연 그래도 그들은 살 수 있을까?


서주원(이기우 분) 역시 어쩌면 피해자였을지 모르겠다. 모두가 아버지의 설계가 잘못되어 사고가 일어났다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죄인의 자식으로 어느새 사과가 습관처럼 입에 붙을 정도가 되었다. 어머니는 사고의 수습을 위해 원치도 않는 재혼까지 해야만 했다. 말이 재혼이지 사실상 식모살이다. 사랑하는 사람마저 포기해야만 했다. 그나마 하문수나 이강두보다 서주원이 나은 것은 직접 사고를 겪은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고로 가족을 잃고 자신들 역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허덕이며 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기회도 줄 수 있었다. 하문수와 이강두, 당시 사고의 피해자인 두 사람이 직접 폐허 위에 다시 새로운 건물을 올릴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사고의 기억을 떨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다.


하문수가 적극적으로 서주원의 계획에 동참하려는 이유인지 모른다. 그러면 무언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마치 그 사고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강두 역시 과연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협박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누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누가 자신의 삶을 이따위로 엉망으로 망가뜨려 놓았는가. 그에 비하면 로맨스는 작다. 사랑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현실을 견디며 살아가기도 벅차다.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꿈을 보았다. 혼자였는데 누군가 있었다. 혼자라 여겼는데 누군가 곁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오래전 절망 속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던 그들처럼. 사랑이었을까? 하필 드라마의 마지막에 구조당하던 순간의 기억을 떠올린 이유였는지 모른다. 처음으로 남루한 자신이 초라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하문수의 주위에 또다른 현실인 이강두가 다가온다. 서로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도 다른 삶을 산다. 다른 세계를 산다. 하문수가 꿈을 보았을 때 이강두는 다시 비참한 현실을 확인한다. 가진 자에 의해 놀림거리가 되어 매를 맞고 굴욕까지 견뎌야 한다. 버텨보지만 오기인 것을 누구보다 이강두 자신이 잘 안다.


하문수가 좌절한다면 이강두는 분노한다. 하문수가 체념할 때 이강두는 반항한다. 그러나 정작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버스를 타고 그런 서로의 존재를 조금씩 의식한다. 과연 그런 그들의 앞에 희망이란 있을 것인가. 구원이란 있을 것인가. 다른 미래가 펼쳐질까?


무겁다. 우울하다. 아름답고 달콤한 사랑이 아니다. 살기 위한 처절한 투쟁이다. 사랑받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아직 살아있다. 과연 끝은 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