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어느 아이돌의 죽음에 붙여 - 죽을 용기가 아닌 살아야 할 이유...

까칠부 2017. 12. 20. 04:19

흔히들 말한다. 죽을 용기로 살아가라. 죽을 결심이면 뭔들 못하겠는가? 그런데 죽는 것과 사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쉬울까? 죽는 건 순간인데 사는 것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십 년 뒤를 생각한다. 다시 이십 년 뒤를 생각한다. 그때도 지금과 같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얼마나 끔찍한가. 심지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모두가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아닌 지금보다 더 못해질지 모르는 내일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 같은 내일을, 그보다는 오늘보다 더 비참해질 내일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그나마 더 나을 때 오늘 끝을 내자.


죽을 용기같은 것이 아니다. 그냥 포기인 것이다. 좌절인 것이다. 그래서 그냥 여기서 주저앉고 싶은 것이다. 살아갈 용기가 없어서.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 같아서. 사람은 죽을 용기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살 이유를 찾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견뎌야 하는 이유. 내일을 맞이해야 하는 이유. 그렇기 때문에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의지할 단 하나만 있어도 사람은 그리 쉽게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사는 것이 더 두렵다. 죽음의 공포보다 살아야 하는 공포가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이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유가. 혹은 누군가이던가 혹은 무엇이던가.


의외로 노숙자 가운데 자살자의 수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사실 자살이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매우 존엄한 선택 가운데 하나다. 더이상 비참해질 수 없기에. 더이상 비루해질 수 없기에.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존엄할 수 있을 때 자신이 직접 죽음을 선택하려 한다. 삶을 선택할 수 없기에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다. 자신의 삶에 진지하고 자신의 존재에 엄숙할 수 있는 이들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자살을 이야기하고 혹은 실제 실행하는 사람들을 나약하다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이유를 이해한다. 그렇게 해야 자살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인데, 말한대로 자살이란 무엇보다 존엄한 인간의 자신을 위한 선택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살을 비천하고 비참한 것으로 만들어야 자살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자살하려는 사람을 완전히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죽은 이를 모욕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사실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한다. 남자아이돌따위 아예 관심도 없다시피 하다.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떤 노래를 불렀고, 어떤 무대를 보여주었었는지. 어떤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는지도 역시. 남자아이돌 출연하는 예능은 일단 거르고 본다. 하지만 그 죽음에 대해 쏟아지는 말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그는 과연 왜 죽은 것일까? 어째서 죽음이라는 극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당연히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그 고민을 치열하고 한 편으로 처절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자기만의 이유겠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고 진실하게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란 사실이다.


어떤 고민이 있었을까 알지도 못하고 떠드는 것은 위험하다. 어떤 일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는가 지레짐작하는 것도 경솔하다. 그냥 이해한다. 그만큼 힘들었겠구나.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울 만큼 그에게도 힘든 일들이 있었겠구나. 그러니 선택한 만큼 그에게도 평안이 있기를.


모두가 강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현명할수도 지혜로울수도 없다. 항상 냉정하고 이성적일 수만도 없다. 그런 불안함이 인간을 인간이게 만든다. 그저 인간이었을 뿐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참 낯간지럽다. 그리고 미안하기도 하다. 결국 내 이야기다. 나 자신을 위한. 행복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살아서나 혹은 죽어서나. 언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