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랑하는 사이 - 살아있다는 죄!!!
때로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 단지 살아있다는 그 하나만으로 죄인이 되어야 한다. 자기 잘못도 아닌데.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다른 누군가의 잘못이었을 텐데도. 그러나 죽은 사람이 있는 이상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대한 부채까지 떠안아야 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하물며 기억하는 것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남은 사람들의 절망어린 얼굴과도 마주해야 한다.
차라리 자기를 원망한다. 차라리 다른 누군가를 원망한다. 아니 그조차도 자기를 학대하기 위한 핑계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마저 그 누군가의 탓이다. 자기가 자포자기하여 엉망으로 만들고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누군가를 탓하고 만다. 마치 추모비를 부수느라 너덜너덜해졌던 이강두(이준호 분) 자신의 손바닥처럼. 차라라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더 속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이만큼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래도 고통스러우니 아직 자신은 살아있어도 된다.
그래서 답답한 것이다. 아니까. 너무나 잘 아니까.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는 하문수(원진아 분)의 사정을 알기에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정나미없이 야무지고 똑부러지고 착해빠지고. 하지만 사람이란 것이 그런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때로 악쓰고, 때로 울부짖고, 때로 머리끄댕이든 멱살이든 잡아댄다. 하긴 이강두 자신도 동생 이재영(김혜준 분) 앞에서는 하문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힘들고 아픈 것을 동생 앞에서만큼은 드러내지 않으려 필사적이 된다.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자기가 지켜야 할 유일한 가족이었으니까.
한 번 쯤 이렇게 모든 것을 쏟아내 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가리거나 거리끼는 것 없이 솔직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응석도 부리고, 앙탈도 부리고, 되도 않는 고집도 세워보고. 귀여웠다. 술에 취한 연기가 그다지 썩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필사적인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기대고 싶었다. 고마움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무심결에 키스도 했다. 아무라도 바로 곁에서 자기가 하는 말을 그저 들어만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럴 수만 있었더라면. 엄마 앞에서 자신은 죄인이고 아빠 앞에서도 자신은 아무 할 말이 없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하문수가 서주원(이기우 분) 앞에서 지레 물러난 것이 단순히 신분의 차이만은 아니었다. 경제적인, 혹은 사회적인 격차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기에게 벌주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차마 그 존재조차 말하지 못한 자신에게 사랑할 자격 따위는 없었다. 산 사람에도 죽은 사람에도 속하지 못한 그 이름을 혼자서 가슴에 묻고 있는 한 자기는 더이상 사랑같은 건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한 눈에도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이강두라면 그런 자기라도 크게 상관없지는 않았을까. 지켜야 할 가족도 아니고, 움츠러들만한 잘난 남자도 아니고, 자기처럼 상처도 많아 보이고. 무엇보다 자기에게 친절하다. 단 한 사람 이강두에게만큼은 어찌되었든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자연스러운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무의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고 현장에서 이강두와 하문수는 함께 있었다. 마주하고 대화도 나누고 있었다. 의식은 잊고 있지만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나마 이강두가 기억하고 있으니 그 기억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이 상처투성이인 서로에게 이끌리며 치유되어 가는 과정을 시리도록 담담하게 그려낸다. 여전히 자기의 상처에도 익숙해질 수 없기에 서로의 상처에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익숙해진다. 혼자가 아니니까. 그래도 자기들끼리 있을 때만큼은 상처는 평범한 일상일 수 있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서주원과 정유진(강한나 분) 사이에 또 하나 감춰진 사연이 드러난다. 서주원의 아버지를 설득한 것이 바로 정유진이었다. 서주원의 아버지가 사고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오욕속에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정유진이었었다. 정유진이 여전히 서주원에게 집착하고 서주원이 그녀를 밀어내려 애쓰는 진짜 이유였다. 부모의 재혼같은 것은 그냥 핑계일 뿐이었다. 정유진의 죄책감이었고 서주원의 원망이었다. 아마도 정유택(태인호 분)의 방황 또한 그와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현장에서 정유택의 처남과 관련한 부정이 인부들 사이에 조금씩 흘러나고오 있었다. 아니 하필 그 현장에 나타난 것이 얼마전 만났던 피해자의 가족이었다는 것은 장차 전개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그러니까 가해자들에게도 당시의 사고는 다 끝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죽은 사람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앞으로 죽는 그날까지 그 날의 사고를 기억하며 살아갈 것이다. 가해자들도 마찬가지다. 아예 잊을 수 없으면 억지로 부정하거나 아니면 자기변명으로 덧칠을 하거나. 사람이 괴물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자기가 그렇게 믿어 버리면 진실이 된다. 정의가 된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기억이 남아 있는 이상 정작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들로 풀어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원망하고, 화내고, 갈등하고, 다투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이야기 가운데 진지하고 심각한 주제들을 거슬리지 않게 그러낸다. 그냥 사랑하는 사이라는 제목이 주는 역설을 매순간 깨닫게 한다. 하긴 그냥 사랑만 하는 것이 그리 쉬웠으면 그 수많은 멜로와 로맨스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사랑만 하기 위해서 사람이 딛고 이기고 때로 묻고 잊으며 넘어가야 할 이야기란 얼마나 많은가.
지나치지 않아서 더 아프게 와닿는 드라마다. 넘치지 않아서 더 애정을 가지고 지켜보게 만든다. 사랑했으면 좋겠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도 웃고 있다. 그 와중에도 사랑하고 있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살아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특히 주인공들의 모습이 예쁘다. 그래도 사람은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사랑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