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리고 바로 구로구청 근처에 있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쯤 하면 나이 좀 있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 것이다.

여름 내내 시끄러웠었다. 그런데 사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6.29 이후 만화방에서 만화책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성인만화였지만 당시 만화방에 그런 게 있을 리 있나. 만화광장이며 주간만화며 읽는데 맨 벗고 섹스하는 이야기만 나와야 할 성인만화에 당시의 처절한 상황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이나 알았을 법한 이야기를 그때 이미 만화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 국장에 상복까지 차려입고 따라가셨던 아버지가 정작 6월 항쟁 당시 거리에 계셨다는 것이다. 심지어 당시 대선에 후보로 출마했던 백기완을 지지하고 계셨다. 결국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며 후보사퇴한 다음에는 김영삼을 지지하셨을 텐데. 그때 아버지가 왜 김대중을 욕했고 이후로도 차라리 이회창을 지지할지언정 김대중을 용서하지 못했는제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안철수의 선택을 비판하면서 끝내 김대중을 평생 따라다닌 원죄에 대해 말한 것도 그런 영향. 

그런 시대였다는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민주화를 뜨겁게 바랐던. 겉으로는 독재에 순응하면서도 그러나 언젠가 찾아올 민주화를 기대하고 있었던. 거리에서 학생들 데모하다 경찰들에 쫓기면 몰래 숨겨주고 먹을 것이며 챙겨주던 것이 평범한 가정집 주부들이었다는 것이다. 경찰들이 쫓아오면 골목을 달려 도망치다가 아무집이나 문을 두드리면 혹시나 누가 볼새라 숨겨주고 남모르게 응원해주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어 학생들의 투쟁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자식에게는 데모같은 것 하지 말라 하면서도 물색모르고 위장취업은 잘못된 것 아니냐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라며 그 위장취업한 사람에게 투표하던 평범한 부모들이 있었던 것처럼. 나야 그냥 TV에서 신문에서 보도한 대로 읊은 것 뿐이었는데.

누군가는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라며 그저 영화로서만 1987년을 대하기도 한다. 어째서 영화에는 영웅이 없는 것일까? 어째서 영화속에서는 자신을 이입할만한 확실한 주인공이 없는 것일까? 그러니까 구로구청에서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 정확히는 직선제를 쟁취했음에도 선거에서 민주화진영이 포기한데 대한 좌절과 분노로 시위를 하던 그때 바로 그 근처에 있었다는 것이다. 시위 때문에 학교도 휴교하고 심심해서 도대체 시위란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인가 궁금해서 찾아갔다가 그 광경을 직접 지켜본 바 있었다. 전에 알던 지인 하나가 그때 그곳에서 직접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해서 신기해 한 적이 있었는데. 사과탄을 뒤에 숨기고 준비하다가 학생들이 다가서자 일제히 달려가던 백골단과 - 그때 백골단도 처음 봤다 - 골목길로 쫓겨 달아나다가 아무 집이나 집주인의 도움으로 숨어들어가던 대학생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주인공이라... 그러니까 어떤 주인공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분 당시 거리로 쏟아져나왔던 사람들은 연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일부는 무관심했고, 일부는 체념했고, 일부는 외면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진심으로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대를 바꾼 진정한 주역들에 대한 이야기다. 보도에서 시위를 구경하면서도 응원하며 박수쳐주고, 혹시라도 경찰에 쫓겨 도망가면 숨을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해주고, 멀리서나마 누가 욕하면 대신 편들어주던. 아마 그런 시대를 공감할 수 있었기에 굳이 주인공이 없어도 사람들은 이야기속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그냥 생각났다. 하여튼 1년 내내 뜨거웠었다. 지금도 아버지의 영향인지 나는 김대중을 온전히 용서하지 못했다. 민주화에 대한 기여 만큼이나 당시 김대중의 욕심이 역사에 끼친 해악은 컸었다. 결국 김영삼이 군사독재세력에 투항해서 그들에게 민주화의 명분까지 쥐어준 것도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에 남아 있는 과거 민주화진영 출신 인사들은 김영삼의 영향으로 그곳에 자리잡게 된 경우들이다. 1987년으로 불행한 역사가 끝나지 않은 원죄는 그래서 전적으로 김대중에게 있다. 이후의 공적 역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건 이것 저건 저것. 그래도 결국 정권교체를 이뤄낸 공은 크다.

공감하는 어떤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어떤 사람들과 끝내 공감할 수 없는 어떤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또다른 사람들. 그렇게 기억이란 역사란 이름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