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랑하는 사이 - 그냥 사랑하기 위한 조건, 삶이란 이유
그러니까 세상에는 도저히 의지만으로 안되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마음이야 당연히 과거의 상처따위 훌훌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현재의 행복을 즐기고 싶다. 과거에 사로잡히기보다 현재에 충실하며 내일의 행복을 만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안되는 것은 그 상처로 인한 고통이 과거의 기억을 자꾸만 일깨우기 때문이다. 족쇄처럼 칭칭 얽어 맨 채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자기만 살았으니까. 자기만 멀쩡하니까. 자기가 불렀던 첫사랑 오빠는 그로 인해 결국 목숨을 잃었고, 자기를 대신해 뒤에 남았던 이강두(이준호 분)는 평생의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자기가 아니었더라면 자기만 아니었더라면. 도대체 얼마나 더 힘들어하고 아파해야 상처는 자신을 놓아주려는 것인지. 자신들을 놓아주려는 것인지. 그럼에도 살아야 하는 것은 반드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나로 인해 슬퍼하고 아파할 사람들이다.
어쩌면 오기였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와 자신만을 남겨두고 아버지는 무책임하게 혼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아버지가 뒤집어쓴 오명과 함께 남겨진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가혹한 현실들이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아버지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세상을 향하게 된다. 보아라.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무책임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약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비난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 진심을 꿰뚫는다. 하문수(원진아 분)가. 그리고 다시 정유진(강한나 분)이.
처음부터 서주원(이기우 분)이 원망했던 것은 무책임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린 아버지였었다. 그런 아버지를 지키지 못했던 자신이었었다. 단지 살아있었으면. 그저 살아서 어머니와 자신의 곁에만 있어 주었으면. 그랬으면 자기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모든 진실을 밝혔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켰을 것이다. 비로소 정유진의 진심과 마주하며 깨닫는다.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자신이 무엇을 위해 지금의 일을 시작했었는가. 진정 원망해야 할 대상도 미워해야 할 대상도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다른 곳에 있었다.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미련도 원망도 남기지 않기 위해서. 허술하게 그저 임시방편으로 땜질만 하고 끝날 일이 아니다. 차라리 이별로 아파하더라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괴롭더라도. 오래된 보일러를 고치기 위해 잠시 가게 문을 닫고 바닥을 뒤집는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간부전을 치료하기 위해 이식을 받아야 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스스로 묻고 답한다. 자기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하문수를 향한 마음을 쫓아 달려온 이강두처럼. 이것으로 좋을까? 이대로 후회와 미련을 남긴 채로 이별해도 좋은 것일까?
치유의 단계다. 지금을 받아들인다. 과거까지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는다. 많이도 아니다. 딱 한 걸음씩이다. 비로소 아들의 마지막 유언과 핸드폰을 받아들고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동안 애써 거부해 왔던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비로소 목놓아 울 수 있었다. 과거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재조립한 추모비처럼 과거를 억지로 외면하기보다 정면으로 마주하며 내일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다. 마음껏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바를 깨닫는다.
죽음의 앞에서야 진실해진다. 절망 앞에서 모두는 긴절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들을 궁지로 내몰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게까지 해야지만 이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다시 한 번 '그냥'이라는 말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 '그냥'조차 너무나 무겁고 버거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조차 행복하기를 바라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들을 말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사랑해주는 사람을 위해서.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서. 그래서 삶이란 유일한 가치인 것이다. 사랑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원망하고 그리워하는 것도 모두 살아있기에 가능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도 모두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 그래도 마지막은 웃으며 끝낼 수 있기를. 드라마임을 믿는다. 너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