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그냥 사랑하는 사이 - 삶이란 선과 정의, 그냥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까칠부 2018. 1. 31. 07:06

산다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선인 이유다. 사이비와 그렇지 않은 종교를 구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대개 사이비 종교들은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현실의 삶보다 더 가치있는 것들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것이 과연 세상에 있기는 한가. 가족마저 저버리고 소중한 이들과도 단절한 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이 있다. 그래서 사이비라는 것이다.


단순히 살고자 하는 본능만이 아니다. 단지 자신을 위한 이기만이 아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천하에 없는 쓰레기에 말종들조차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기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혼자 편하자고 고고하자고 덜컥 죽어버리면 남겨진 그런 마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살이 죄인 이유고 죽을 용기가 아닌 살아갈 용기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더럽고 치사하고 힘들고 외롭고 추레하고 굴욕적이라도 어찌되었든 살아있는 이상 살아가려 발버둥이라도 쳐야만 한다.


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이강두(이준호 분)가 살아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살아서 행복할 수 있기를, 그것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만큼 힘들었으니까. 그만큼 괴로웠으니까.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자기 간을 내어주고서라도 살기를 바라고, 자식의 간을 내어주어서라도 함께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들이 결정적으로 모두의 마음을 치유한다. 오랜 사고의 기억을, 상처를 말끔히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한다. 비로소 이강두의 시간은 사고가 있고 겨우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다름아닌 사람의 마음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그가 살기를 바라는 사랑의 감정이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치유하고 사람을 구원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면서 해피엔드를 기대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냥 주인공 혼자 잘먹고 잘사는 해피엔드가 아니다. 치유되고 구원받는 진정한 해피엔드다. 뭐 대단할 것 있는가. 크게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대단한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된 것도 아니다. 하문수(원진아 분)에게나 이강두에게나 여느 사람이나 다름 없는 그저 평범한 일상들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무심코 집어들어 입안에 넣는 아이스크림처럼. 길거리의 붕어빵이나 떡볶이, 오뎅, 순대처럼. 라면이나 소주처럼. 그리고 돌아가면 맞아주는 소중한 사람이 있다. 기다리면 자신을 찾아와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동태탕을 받아들고 사진부터 찍어 보내는 아빠와 같이 치료받는 환자의 머리를 만지다 반겨주는 엄마가 있다. 사진부터 찍어 보내야 하는 딸이 있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찾아와주는 딸이 있다. 상처가 다 치유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만으로 살아갈 힘이 된다.


마음껏 화내고 마음껏 슬퍼하고 있는대로 상처입고 괴로워 하면서도 마침내 일어설 힘을 낼 수 있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엄마도 딸을 위해서 오랫동안 원망만 하던 남편과 이혼하고 스스로 알콜중독을 치료할 결심도 할 수 있었다. 아빠도 항상 자신을 찾아와 걱정해주는 딸이 있었기에, 그리고 딸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자신의 모습이 있었기에 비로소 원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약하기에 또한 누군가를 위해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정유진(강한나 분)은 누구보다 강한 여성이다. 자신의 실수를 딛고,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며 스스로 홀로 서려 한다. 이미 홀로 서고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것은 그녀 또한 외로운 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 하문수를 통해서. 이강두를 통해서. 무엇보다 정유진을 통해서. 혼자서만 괴로웠던 것이 아니었다. 혼자서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고 짊어지고 버틸 것이 아니었다. 마음껏 기대고 마음껏 응석부리고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는지. 혼자서 서려 한다. 혼자서 가려 한다. 자유롭다는 것은 한 편으로 돌아갈 든든한 곳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패해도 좌절해도 길을 잃고 헤매다가도 여전히 다시 돌아가 기댈 따뜻한 곳이 있다. 서주원(이기우 분)는 그래서 혼자서 자신의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솔직히 무리수였다. 너무 작위적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쉽게 필요한 때 이식할 장기가 생긴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사람만 몇 명인데 하필 그 시점에 이강두에게 필요한 장기가 생겨서 바로 이식수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누군가의 비극으로 인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얻게 된 삶이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모두를 위해 이강두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니까. 그래서 상관없다. 작위적이든 어쨌든 살아있기를 바랐고 행복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래도 살아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만 받아들인다.


그래서 삶이란 가장 큰 선이고 가장 큰 사랑인 것이다. 죽어서 선한 것은 없다. 죽어서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도 없다. 남겨진 이들의 상처와 아픔 위에 올려질 어떤 선도 사랑도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의 세계에서는. 그래서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살아가야 한다. 힘들어도 아파도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런 모두를 위해서. 끔찍한 상처 속에서도 아픔 속에서도 살고자 하는 모두를 위해서. 위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살아 이렇게 행복하게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냥 해피엔드가 좋다. 좋은 사람이 그저 좋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렇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겪고 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될수록 더 그렇다. 배우 원진아를 발견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일상의 표정들을 예쁘게 지어 보일 줄 안다. 이준호는 역시 가수보다는 배우가 천직인 듯하다. 예쁜 사람들은 예쁘게 살아가야 한다. 간절한 사소한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