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 엄마는 딸을 사랑하고 딸은 엄마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 것과 기르는 것은 별개라는 것이다. 당연히 엄마이니 자기가 낳은 아이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얼마나 사랑해주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엄마로서 사랑하는 만큼 아이를 사랑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상처가 되고 죄가 되어 자신을 옭죈다. 그리고 결국 도망치고 만다. 난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 난 엄마가 될 수 없어. 사실 아이들은 그렇게 대단한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음에도.
기댈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차수진(이보영 분)의 친엄마 홍희(남기애 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부모를 피해 친구집을 전전하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살기도 했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막연히 아이와 함께 있기만을 바랐었다. 술만 취하면 여자를 때리는 쓰레기라도 아이와 함께 TV를 보면서 저녁을 먹을 수 있게 해 준 그 남자가 그래서 너무 고맙고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마저 어려서 돌아가고 기댈 곳이 없었던 자영(고성희 분)에게도 설악(손석구 분)은 도망쳐 숨을 수 있는 소중한 탈출구이며 의지처였었다. 그의 곁에서 자영은 그 지긋지긋한 엄마로서의 무거운 책임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엄마로서 자신도 성장해야 한다. 엄마 차영신(이혜영 분)의 한 마디는 그런 모든 것들을 아우른다. 그냥 낳기만 해서도 엄마가 아니다. 기르기만 해서도 엄마가 아니다. 그저 사랑해주고 베풀어주는 것만이 엄마의 역할이 아니다. 자신이 혹시 엄마로서 방심했던 것은 아닐까. 오로지 땅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딸이 엄마인 자신에게 기대지 않았었다. 사실을 숨긴 채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고 있었다.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무겁고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그런 때 엄마로서 자신은 딸에게 어떤 조언을 했어야 하는 것일까. 도망치려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하려는 것이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차수진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엄마로서 자신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서. 이제부터는 엄마인 차수진이 감당해야 할 그녀의 몫이고 그녀의 책임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얼마나 사랑해주어야 할까? 산수가 아니다. 하나에 하나를 더한다고 반드시 둘이 되는 것이 아니다. 포근한 아이의 젖살 만큼 아이들은 많은 것을 빨아들이고 그리고 제멋대로 튕겨낸다. 그마저도 모두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차영신의 선택이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보니 오래전 읽은 어느 이야기의 내용이 떠오른다.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들어주었을 때 의붓어머니는 그저 남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날 자기가 잘못했을 때 회초리를 들고 우는 모습을 보면서 비로소 어머니라 여기기 시작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때로는 아이에게 기대도 괜찮지 않을까. 자기가 사랑하는 만큼 아이로부터도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별다르지 않게. 그래도 어쩔 수 없으면 그때는 도망칠 수 있도록 주위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모든 여성이 엄마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 아이를 낳았다고 모두가 자연스럽게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때는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 가족이라든가, 아니면 사회라든가. 누군가는 간절히 그런 아이들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차영신이 누구보다 훌륭한 엄마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차수진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엄마가 되고자 하는 것처럼. 그러고보면 도망치고 숨고 잊는 것 또한 살기 위한 인간의 너무나 당연한 본능이지 않은가. 엄마이기 이전에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굳이 억지로 자영이 혜나(허율 분)의 엄마로써 그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더라도 충분히 엄마로서 혜나를 사랑할 수 있다. 최소한 차수진이 데려간 혜나를 그대로 떠나보낼 정도로 혜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엄마만 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차수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엄마가 시킨대로 잊은 채 엄마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너무 말을 잘 들어 탈이었다. 너무 완벽하게 잊은 탓에 엄마를 원망하고 있었다. 차수진이 엄마를 살렸다. 차라리 딸과 함께 죽으려던 엄마를 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죄인이 되어 딸을 버렸고 다시 살아서 딸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혜나가 떠난다. 엄마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다시 엄마가 자신으로 인해 곤란해진 것을 알았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부모가 일방적으로 사랑하기만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든지 부모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또한 주체다. 그 사실을 일찍 자영이 알았더라면. 하지만 수진의 엄마 홍희도 자영도 엄마가 되었을 때 아직 너무 어렸었다.
이야기를 집중한다. 주제를 집약한다. 배경도 등장인물도 제한되어 있다. 정해진 공간과 사람들만을 오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오로지 엄마와 딸이라는 하나의 주제에만 천착한다. 이야기가 깊어진다. 엄마란, 그리고 딸이란, 본능을 넘어선 인간으로서의 이해를 담아낸다. 그러니까 엄마로써 혹은 딸로써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남성은 주변을 맴돈다.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인 탓이다. 그리 쉽고 편한 이야기는 아니다. 보는 내내 몇 번이나 불편해서 고개를 돌리고는 했었으니.
혜나가 집을 나갔다. 경찰이 차수진이 혜나를 데려간 사실을 알았다. 자영이 수진의 집까지 혜나를 찾아왔었다. 경찰이 사실을 알리자 순순히 동의해준다. 절에서 혜나를 위한 불공을 드리고 있었다. 설악은 수진과 혜나를 쫓아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 듯하다. 엇갈리는 감정과 겉돌듯 수진과 혜나를 쫓는 악의가 경찰의 집념과 어울리며 긴장을 높인다. 어떻게 이야기들은 마무리될까.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