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잔혹한 죄악과 슬픔
사실 그래서 나도 애들을 싫어한다. 아마 출산률이 낮은 진짜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시끄럽고, 더럽고, 말도 안 듣고, 울기만 하고, 그렇다고 때리기도 소리를 지르기도 너무 작고 약하다. 그러니까 어찌할 줄을 모른다. 뭐라도 어떻게 달래고 어르고 싶은데 도대체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아이를 기른다는 자체가 보통 정성과 인내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모성을 핑계삼아 여성에게 그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만다. 문제는 정작 대부분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약자라는 사실이다. 더구나 엄마 혼자서 아이까지 데리고 머물 집을 구하고 번듯한 일자리라도 찾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세상의 온갖 차별과 편견을 견디며 현실의 문제들까지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느 순간 아이가 짐처럼 여겨지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니까 혜나(허율 분)의 친엄마 자영(고성희 분)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차수진(이보영분)의 친엄마 홍희(남기애 분)도 그 모진 학대를 견디면서까지 남자에게 기대야 했던 것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혼자서 아들 설악(손석구 분)을 길러야 했던 엄마의 절망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남성에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느껴야 했을 막막함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리고 설악도 알았던 것이다. 엄마들이 이렇게 힘들구나. 이렇게 아프고 고단하구나. 아이 때문에.
설악도 아빠가 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었다. 아빠가 되어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전혀 배우지 못했었다. 그러니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끌리니 여자들도 만났을 텐데 그 여자들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자기가 어떻게 해야 여자들의 짐을 덜어 줄 수 있는지. 그러고보면 하필 그동안 설악이 만난 여자들도 대부분 아이가 있는 여자들이었다. 진짜 죽이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아니었을까. 차라리 그때 자기가 죽었더라면 엄마가 죽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는 후회와 자책이 아니었을까.
출산률과 관련한 통계에서 흥미로운 것이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비혼출산의 비율이 매우 낮다는 것이었다. 하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도 마음놓고 기를만한 환경이 되지 않는다. 여전히 엄마의 모성에 기대고, 엄마의 희생과 헌신에만 맡기려 한다. 일단 아이를 낳고 나면 더이상 자기 일을 하는 것도 자신의 삶을 갖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하물며 결혼도 않고 아이를 낳게 되면 그 다음의 일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차라리 아이를 버리고, 심지어 아이를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게 버려진 아이들이 세계로 수출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굳이 서로 엄마라 딸이라 여기며 부르는 차수진과 혜나를 잡으려 뛰어다니는 경찰들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그런 것이 무에 중요한가. 무엇이 진짜 중요한가.
혜나를 납치해 살해하려는 설악의 범죄 이면의 오래된 상처를 본다. 그리고 그 상처에 숨은 친엄마의 고통을 본다. 그까짓 남자 상관없이 혼자서 살아갈 용기가 있었다면. 당연히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며 그렇게 익숙하게 여기며 살고 있었다면. 아들 하나 쯤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기를 수 있다. 도저히 안되겠으면 가까운 곳에 손내밀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 포기하지 않아도 되도록. 굳이 더 용기를 내거나 강해지지 않아도 되도록 가까이서 지탱해 줄 수 있는 누가 혹은 무엇이 주위에 있다. 그러려면 돈이 든다. 참 치사한 것이다. 아이는 낳아야겠고 그런데 거기에 내 돈을 쓰기는 싫고. 여전히 달라진 것 없는 기성세대의 이기심과 관성이 결국 젊은 세대로 하여금 포기하게끔 만들고 만다.
전세대의 유산이다. 전세대의 죄업이다. 차수진도, 자영도, 설악도. 그래도 차수진은 진심으로 사랑해 준 또 한 사람 엄마가 있었다. 어쩌면 진짜 혼자가 되어 자기가 낳은 딸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자영에게는 설악이 있었다. 설악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른 방법은 아예 알지도 못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극심한 혼란 속에 자영 또한 극단의 선택을 한다. 누구도 그녀에게 엄마가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이고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가 되는지 누구로부터도 배우지 못했다. 그저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 마냥 떼를 쓸 뿐. 그래도 엄마이기에 누구보다 딸 혜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이고 싶을 만큼 사랑하고 있었다. 설악과 닮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만났는지 모르겠다.
특정한 개인에 대한 분노보다 그렇게 된 현실의 원인들에 대한 분노가 앞서게 된다. 사실 인간의 자유의지란 가장 야비하고 무책임한 사기이자 기만일 것이다. 엄마가 엄마가 되지 못하고, 엄마가 엄마이지 못하고, 그래서 엄마가 엄마이기를 포기한다. 제목에서 피비린내가 난다. 지독한 눈물의 냄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