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 먼 먼 기억 너머 그리고 현실에서 그들이 만나는 그곳

까칠부 2018. 3. 6. 10:14

다시는 그런 좋은 일따위 내게 없을 것이다. 그런 좋은 시절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주 어릴 적에도 그런 생각들을 한다. 앞으로 다시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래서 다른 것이다. 진짜 지치고 치여서 더이상 꿈따위 꿀 수 없게 되어 버린 이후와 단지 지레 놀라 그렇게 그리 단정짓는 것과는.


처음부터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관계였다. 악의는 없었다. 그냥 삶에 지쳐서. 고단한 일상이 치이며 떠밀리다가. 그러니까 돈도 많고 독신이라니까 그 덕이나 한 번 봐 보자. 어차피 나날이 고통이고 매순간이 자신을 힘들게 할 뿐이라면 그렇게라도 숨통을 틔워 보자. 장난같았다. 전혀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마치 바겐세일하듯. 중고시장에서 땡처리하듯. 어차피 자신따위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가 목적으로 삼은 시청자층이 드러난다. 어쩌면 판타지일 것이다. 그런 자신을 그동안 모르게 지켜봐 온 사람이 있었다. 하필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마다 마주치고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하필 그 사람과 아파트 위아래층에서 살며 운명처럼 어울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던 순간 그녀를 위해 그 남자는 나서고 있었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서로 모른 채 지나온 고통스럽던 시간들이 그렇게 이 순간 다시 만나고 있었다.


과연 당시 남자가 울부짖는 여자를 보면서 떠올린 감정은 무엇일까? 무엇이 1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결같이 그 모습을 기억하게 만든 것일까? 자기처럼 아파서? 자기처럼 외롭고 괴로워서? 아니면 자기 대신 울어주어서?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도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전하지 못한다. 마치 자신을 벌하듯 누르고 또 누르며 살아가는 모습은 차라리 죽지 못해 사는 것 같다. 어쩌면 딸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도 다른 무엇보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때문은 아니었는지. 아내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하긴 여자도 다르지 않다. 불륜이 죄인 것인 멀쩡한 배우자를 한순간에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불륜을 저질러서만 죄가 아니다. 불륜을 저지르게 만들었기에 죄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죄인이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이별하는 순간 그래서 죄인이 되어 버린다. 이별이 슬픈 것은 무엇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껏 떠나간 사람만 욕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을.


오히려 안수진(김선아 분)의 주착과 수선들이 드라마를 더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고 만다. 거칠고 메말라 보이게 하고 만다. 아무 진심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악다구니같은 독백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게 한다. 차라리 대놓고 고독에 빠져든 손무한(감우성 분)보다도 더 처절하게 고독하다. 그마저도 김선아라는 배우의 역량일 테지만. 태연하게 슬프고 우습게 외롭고 당연하게 아프다.


사실 사랑이 죄는 아닐 것이다. 아내가 있는 남자라고 사랑해서 안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만큼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 더구나 아직 보수적인 한국사회에서 그로 인해 짊어져야 하는 짐은 크고 무겁다. 그 또한 발버둥이다. 살아가기 위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아가기 위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키스부터 시작한다. 어차피 십대의 순수한 감정에서 시작된 사랑도 아니었고, 아니 이미 두 사람 모두 사랑같은 것은 믿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고 현실의 탐욕이었다. 그것을 이어주는 것이 본질의 육체관계다. 몸과 몸이 먼저 부딪힌다. 그들의 관계는 오로지 현실에 속한다. 진짜 어른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