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 세상이여 안녕...
일본드라마를 - 아니 만화든 소설이든 일본의 대중문화를 소비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되는 것이 알 수 없는 허무함같은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어야 했었다. 마치 예정된 운명처럼 너무나 쉽게 체념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어릴 때는 그런 것들이 무척 현학적으로 여겨졌었다.
마지막까지 발버둥쳐야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부여잡고 놓지 않아야 한다.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떠나야 함을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놓거나 하지는 못했다. 마지막까지 사랑하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면서. 그래서 차영신(이혜영 분)의 죽음은 그리도 잔잔하게 눈물을 자아내는 것일 게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히 사랑한 자신을 그대로 품은 채 눈을 감았다.
운명이라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정했지만 혜나(허율 분)는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아직 어린데도 스스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엄마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때로 분노하고 때로 실망하고 때로 원망하면서 때로 배신감에도 떨지만 그럼에도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지나온 자신의 시간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정면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1과 2 사이에도 무수한 숫자들이 존재한다. 자기가 누구의 아이이고 누구에게 태어났으며 그러므로 누구인가. 그러고보면 데카르트가 옳았다. 그런 고민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진짜 자신의 증거인 셈이다.
고민하고 갈등하고 혼란스러워 하면서 조금씩 자신을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항상 즐겁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힘들고 괴로운 가운데서도 묵묵히 앞을 보며 한 걸음씩을 내딛는다. 그런 힘이 있다. 아마 한국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가 있다면 그런 부분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실망스러운 드라마라도, 중간에 보다가 때려치고픈 드라마라도, 결국 한국의 드라마에는 한국인만의 끈질긴 집념과도 같은 낙천과 긍정이 담겨 있다. 끝내 좌절하고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저 영원한 시간 가운데 잠시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과거 썼던 글 가운데 참조.
그래서 같은 드라마를 원작으로 해도 일본드라마는 쓸쓸할 정도로 담백한데 한국드라마는 지겨울 정도로 감정이 넘친다. 또 그런 드라마들이 성공하기도 한다. 울부짖고 악다구니를 쓰다가 어느새 환하게 웃음짓고 있다. 원망과 질투의 감정이 교차하는 가운데 강수진(이보영 분)의 어린시절 사진을 보고 웃으며 눈물짓는 모습 그대로일 것이다. 세상을 믿고 인간을 믿고 운명을 믿고 무엇보다 인간의 정의를 믿는다. 하긴 그러니까 온갖 아줌마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학생 아이들까지 촛불 하나 들고 광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일 게다. 국민이 원한다면 정부는 당연히 들어주어야 한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
후련해지는 것 같다. 그것은 결말이라기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용기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세상이, 법이 그렇게 정했어도 자신은 그렇게 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혜나는 윤복이고 강수진 자신의 딸이다. 강수진은 윤복의 엄마다. 물리적 거리마저 무시한 채 그들은 그것을 확인한다. 그러니까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마음껏 화내고 원망하며 무엇보다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사랑한 채 살아가기 위해서. 참 의심도 많고 욕심도 많고 그런 주제에 가만히 있으려 하지도 않고. 지겨운 것이 또 한국인의 감정이고 정서라서. 그러니까 이렇게 나도 이런 오지랖넓은 글이나 쓰고 있을 수 있는 것일 테지만.
이혜영을 보면 진짜 베테랑의 존재감이란 무엇인가 저절로 깨닫게 된다. 전처럼 자주 대중의 앞에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경험과 역량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심으로 부딪히면서, 부딪혀 깨지는 파편들처럼. 그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마지막이지만 시작이며 희망이다. 바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