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먼저 할까요 - 먼먼 시간의 끝에서 마주친 지금의 시간들
만남에 우연이란 없다. 먼먼 시간을 넘어 만나는 죽은 별들의 흔적처럼. 하필 죽음을 앞둔 순간 오랫동안 지나쳐왔던 과거의 후회들과 만난다. 어쩌면 사소했을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으로 수많은 비극을 연이어 겪어야 했던 한 여자와 만난다. 그리고 미래가 없기에 그 만남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은 무엇을 세상에 남겨야 하는가.
그래서 과거는 기만이다. 미래란 미망이다. 오로지 현재만이 실제다. 오로지 지금만이 진짜다. 때로는 과거의 원한이나 미련으로 인해. 때로는 미래에 대한 기대나 희망을 위해서. 그러나 정작 진짜는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이곳, 자기가 보고 있는 바로 그것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와 함께 있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어찌되었거나 과거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지금 이순간 손무한(감우성 분)은 안순진(김선아 분)을 사랑한다. 그런 과거의 인연따위 몰라도 안순진은 앞으로도 손무한을 사랑하려 한다. 아니 이제 곧 안순진도 손무한에게 내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과거의 악연까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안순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겨우 찾은 지금의 행복인가 아니면 과거의 원통함이나 혹은 미래의 절망인가.
안순진으로서도 과거의 불행에 사로잡혀 현재에 안주하지 못한 채 부표처럼 떠돌고 있던 터였다. 딸의 죽음과 남편의 불륜, 그리고 이혼, 남은 것이라고는 긴 법정싸움의 결과인 막대한 빚 뿐이었다. 자신의 일에도 지금의 삶에도 충실할 수 없었던 그에게 새로운 인연이 나타난다. 그녀가 그토록 부여잡고 놓지 못하던 과거의 기억처럼 악연으로 얽힌 누군가가 그녀에게 내일이 없는 지금을 돌려준다. 어쩌면 다행일 수 있다. 아주 먼 훗날을 생각할 필요 없이 지금만 생각하면 된다. 앞으로 이 사람과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 없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만을 고민하면 된다. 그동안, 그리고 앞으로, 무엇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간절히 바라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다른 누구보다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아무튼 그래서 은경수(오지호 분)가 개자식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안순진의 후배이던 백지민(박시은 분)과 바람을 피우고 애까지 생겨서 소송까지 한 끝에 이혼하고 재혼한 뒤였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지 않은가. 지금 자신이 책임져야 할 아내와 딸이 있지 않은가. 과거 어떤 인연이 있었든 한 번 배신한 이상 안순진은 전혀 상관없는 남인 것이다. 남편의 불륜과 함께 이혼소송까지 감당해야 했던 전처 안순진에게도 실례고 지금의 아내 백지민과 딸에게도 못할 짓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선의로, 전처인 안순진에 대한 사랑이고 의리라고 자신을 꾸미고 속인다. 그래서 그런 은경수의 행동으로 과연 누가 행복해지고 있는가.
긴 과거의 시간 끝에 미래가 없는 지금 이 순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난다. 먼먼 과거를 딛고 내일의 기약조차 없이 만나서 우연처럼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 시가 급한 것처럼 평범한 연인들과 같이 이런 것도 해보고 저런 것도 해보고, 그러나 시간은 그 모든 것들을 하염없이 기다려주지 않는다. 단 하루를 더 살고 싶은 것은 그만큼 그 하루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지금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기억들로 인해 놓치고 있던 지금의 의미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외로웠기에 행복했다. 불행한 시간들이었기에 서로가 소중했다. 하지만 시작도 끝도 그들에게는 절망일 수 있다.
달달한데 씁쓸하다. 포근한데 시리다. 유쾌하게 웃을 수 있는데 오히려 무겁고 우울하다. 어쩌면 거꾸로일 수도 있다. 씁쓸한데 달달하다. 춥고 시린데 따뜻하고 포근하다. 무겁고 우울한 가운데서도 즐겁게 유쾌하게 웃을 수 있다. 삶의 쓴 맛도 매운 맛도 짜고 시고 떫은 맛도 어느새 익숙해지고 마는 세월이다. 그럼에도 나약하지만 그래서 흔들리면서도 나가는 것이 인간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냥 행복하기를. 누가 되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