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브 - 자신의 기억에 지지 않기 위해서
상처입은 고양이는 아무도 보지 않는 구석으로 숨어들어가 웅크린 채 상처가 낫기만을 기다린다. 도저히 정상적인 움직임이 힘들 정도로 아플 때도 역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외지고 구석진 곳에서 웅크린 채 몸이 나아지기만을 기다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진짜 힘들고 아프고 외로울 때 사람을 점차 주위를 좁히고 마침내 자기만의 세계 안에 갇히고 만다. 더이성 어떤 기대도 희망도 없이 오늘 하루만 지금 이 순간만 지나기를 바라게 된다. 폐쇄적이라는 말은 그만큼 바깥의 세상이 버겁고 무섭다는 뜻이다.
그냥 이해해 버렸다. 답답한데. 미치도록 답답해서 화까지 나려 하는데. 그런데 알 것만 같다. 엄마는 어째서 남편의 잦은 폭력에도 끝끝내 남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가. 아이들은 어째서 그 끔찍한 일을 당하고서도 그만큼이나 끔찍한 아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일까. 그러니까 오양촌(배성우 분)의 딸이 남자친구의 상습적인 데이트폭력에도 오히려 그 남자친구를 위해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는 것과 같은 이유인 것이다. 어느새 나이가 들고 몸도 마음도 전같지 않음을 느꼈을 때 형사 안장미(배종옥 분)는 헤어지려 했던 오양촌의 아내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곳은 안전하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가르친다. 그렇다고 배우고 길들여진다.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너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며 지켜주지도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만큼 너에게 가혹하고 잔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기대며 보호받을 수 있는 대상을 찾아야만 한다. 차라리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이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방패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거부하는 딸에게 못된 짓을 하려는 딸의 남자친구를 본 순간 바로 주먹부터 나가고 마는 아빠 오양촌의 난폭한 야만성을 여성들은 기대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당장의 난폭한 폭력의 논리에 철저히 굴복하여 순종하는 동안에는 그 폭력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것이다.
이를테면 족쇄인 것이다. 어차피 엄마 혼자서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양보해서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고 자신은 새로운 삶을 찾는 편이 모두를 위해 나을 수 있다. 마음으로는 부정하고 싶지만 머리로는 끝내 설득되고 마는 엄연한 현실이 있었다. 그래도 아이를 낳아 기르려면 아이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엄마에게는 남편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남편의 폭력도 끝내 견디며 참아야 했었다. 남편이 죽자 아이들마저 내팽개치다시피 했었다. 남자 없이는 안된다. 남자 없이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자도 비슷한 말을 듣기는 하지만 동기는 전혀 다르다. 남자에게 여자는 수단으로서다. 여자에게 남자는 목적으로서다.
그래서 오히려 성범죄의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경우마저 생기는 것이다. 여성이란 남성을 위한 수단이니까. 남성을 위한 도구니까. 그러므로 여성에게는 그 본질이랄 수 있는 자신의 자궁을 때로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다. 언제로 남성을 위해 쓰여질 수 있도록 순결하게 건강하게 자신의 자궁을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냥 아무일도 없었던 것이다. 책임질 어떤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납득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야만 아직 가치있는 존재로 남을 수 있다.
오히려 더 자학하며 깊숙이 숨고 끝끝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족쇄처럼 그 기억에 구애되고 만다. 그래서 한정오(정유미 분)라는 캐릭터가 흥미로운 것이다. 물론 한정오 역시 단지 그동안 그 기억을 애써 기억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정확히는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숨지 않았고 외면하지도 않았다. 자기 안에 갇혀서 자기 논리에만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엄마가 딸을 아주 잘 가르치고 길렀다. 아마 여자 혼자 몸으로 세상과 싸우며 지금껏 딸인 자신을 지켜온 엄마의 모습이 그녀에게도 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전부터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도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경찰로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피해자를 위해 그녀는 애써 자신의 아픈 상처를 헤집어 꺼내고 만다. 도저히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했을 테지만 경찰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한정오는 피해자인 아이들을 지키고 도와야만 했다.
그러니까 모성이라는 것이 반드시 반페미니즘적인 개념인가 하는 것이다.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엄마의 강인함은 때로 세상 그 자체와 맞서 싸우는 용기가 되기도 한다. 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버린 남자에게 무릎을 꿇을 수도 있었고, 공황장애를 앓으면서도 보험을 팔기 위해 전혀 낯선 사람들과도 어울리며 부딪힐 수 있었다. 한정오도 깨달은 것이다. 가족을 위해 때로 비루해지고 비굴해지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수치스러울 일도 비참할 일도 없다. 정작 분량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한정오로 인해 가장 크게 드라마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일 것이다. 원래 강해서가 아니라 약해진 지금의 모습 만큼이나 엄마로서 한정오의 엄마는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긴 여성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오양촌은 아이와 같다. 특히 안장미와 있을 때 더욱 철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어머니에 대한 애닲은 기억 때문이었을까. 그 때문에 아버지와 화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엄마와 같은 아내의 제안에 어머니를 보낼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어쩌면 젊었을 적 오양촌의 아버지 역시 단지 자신의 아내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비겁하고 그래서 비굴하고 비루하고 그래서 잔혹해지고 난폭해진다. 같은 여성이라도 한정오와 피해자 자매의 엄마가 다른 것처럼 오양촌과 피해자 자매의 아빠도 전혀 다르다. 그래서 하필 피해자 자매가 집으로 돌아간 그 순간 오양촌도 딸에게 못된 짓을 하려는 남자친구에게 폭력을 휘두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더 하고픈 이야기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이야기가 넘쳐나서 하나의 주제로 끝내려 한다. 하필 최근 미투가 이슈가 된 때문이다. 전부터도 관심이 있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태어나는가, 아니면 길러지는가. 최소한 사회적인 의미에서 여성이란 사회적 구조와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할 수 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불합리에는 결국 나름의 원인과 이유가 있다. 여성이 약하고 비겁하고 때로 무책임해지는 이유다. 엄마 혼자서는 아이를 책임지고 기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는 여성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