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웃으며, 사람과 인연의 의미
그러니까 인연이란 끊으려 해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한 것이다. 잊는다고 잊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인연이란 한 번 맺어진 이상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달라지는 것은 그 인연을 대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비운다고 하는 것이다.
인연을 잘라내겠다고 집착하는 순간 오히려 더 그 인연에 구애되고 마는 것이다. 그냥 받아들인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 미안함까지도. 그 아픈 죄책감까지도. 그러고 나면 비로소 홀가분해진다. 사랑도 미움도 고마움도 원망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마지막 이지안(이지은 분)의 미소가 그랬고 박동훈(이선균 분)의 웃음이 그랬다. 그로 인해 구원받았고 그로 인해 성장했으며 그로 인해 이제 행복해질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반드시 맺어져서만 사랑이 아니다. 반드시 함께 있어서만 사랑이 아니다. 반드시 사랑해서만 사랑도 아니다. 그냥 오가며 만나고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그 하나하나를 자신을 위한 계기로 기회로 삼는다. 그렇게 사람은 사람 속에서 성장해간다. 정희네에 사람이 모여드는 이유다. 사소한 만남부터 아주 대수롭지 않은 대화부터 그래서 시덥잖은 웃음까지도. 그런 일상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지안 할머니의 죽음을 배웅하는 웃음으로 바뀐다. 그것이 사람이 사람과 살아가는 이유다.
오랫동안 자신에 대한 실망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큰형 박상훈(박호산 분)은 오히려 이지안을 위해 그동안 모은 돈을 모두 써버림으로써 큰 구원을 받는다. 연인 최유라(나라 분)의 성공에 자극받은 박기훈(송새벽 분) 역시 그동안 포기하고 있던 영화에 다시 도전하게 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회가 되고 사람이 사람에게 계기가 되고 그렇게 사람은 사람으로 구원받게 된다. 그것을 어쩌면 가장 몰랐던 것이 박동훈 아니었을까. 비로소 떠나고 나서야 아내 강윤희(이지아 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미움도 원망도 아닌 단지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단지 가족으로서 아내로서 강윤희를 그리는 것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된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행복해져야겠다 마음먹었을 때 자기가 행복해지기 위해 누가 있어야 하는가를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박동훈의 사무실 책상에 놓인 가족사진이 그것을 말해준다. 박동훈을 박동훈이게 해주고, 박동훈을 박동훈으로서 행복해지게 만들어준다. 아내와 아이, 그리고 바보같은 형제들. 어쩌면 항상 너무 가까이에 있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그것들을 이지안을 계기로 일깨우게 된다.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 존재였는지. 얼마나 축복받은 인간이었는지. 불행한 것은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닌 박동훈 자신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혼자가 되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외롭고 비참한 존재가 되어 있었는지.
그래서 술집 '정희네' 사람들의 선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다. 전혀 아무렇지 않게 의식하지 않으며 무심히 베풀어진다. 그 순간에조차 바보같다. 그 이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함께 있다는 것. 마음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롭지 않다는 것.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 서로를 의식하고 배려할 때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다. 오랜 원망과 후회조차 다시 선의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런 무심한 선의가 서로를 구원한다. 사람이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인연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좋은 인연에 대한 보답은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 인연으로 인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 인연이 고맙고 서로가 고맙다. 우연히 마주친 박동훈과 이지안이 서로를 향해 반가운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었다. 스스로 행복해지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었다. 그래서 비로소 만나 서로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행복해졌다. 당신 때문이다. 당신 덕분이다. 훨씬 나아진 서로의 모습에 보람같은 것을 느낀다. 위안일지도 모른다. 내가 참 잘 살았구나. 이제는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밥도 사 줄 수 있다. 이제는 서로 대등해질 수 있다.
처음 기획안이었다는 남녀간의 사랑보다 그래서 더 벅차도록 감동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사람이 사람을 계기로 바뀌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마침내 해후하는 모습을 비현실적이도록 아름답게 그려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 사람과 사람의 인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을까.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이고, 행복해지려는 이유이며, 행복한 이유다.
여전히 별 일 없이 산다. 자기 일 하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또는 괴로워하면서. 사소한 일로 고민도 하면서. 그러면서 또 누군가를 만나고, 그 누군가를 계기로 삼아 기회로 삼아 그 인연 위에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간다. 모두의 합이다. 모든 인연의 합이다. 지금의 자신이란. 그 반가운 웃음처럼. 일상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