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 주인이 되지 못한 방관자들, 그들의 선택
하긴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구한말 당시 조선에서 조선인들은 주역이 아니었었다. 당사자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방관자의 위치에 있었다. 정확히 케이지에 갇힌 강아지가 아무리 짖고 날뛰어봐야 케이지 너머에는 조금 시끄러운 것 말고 아무 영향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역사의 거대한 흐름 앞에 그저 작기만 한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니까 작가의 가장 큰 장점은 역사의 거대한 서사가 아닌 그 속에 숨은 개인들의 일상적인 삶을 세밀하게 살피고 묘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서 개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외면할 수 없는, 변화하는 시대에 아주 무관심할 수 없었던 수많은 개인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것도 조선의 입장에서만이 아닌 어떤 이유에서든 스스로 미국인이 되고 일본인이 되어 돌아온 또다른 조선인들을 통해 그것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그 시대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한 마디로 반역의 시대였다. 조선이 전부가 아니었다. 조선보다 더 크고 더 강한 나라들이 물밀듯이 밀려들던 시대였다. 일본을 배경으로 삼고 미국을 배경으로 삼으며 그동안의 조선의 권위와 질서는 한갓 것이 되고 말았다. 한낱 백정이 일본을 배경에 두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의 아가씨를 정면에서 마주 볼 수 있고, 천한 노비의 자식이 쳐들어와 총을 겨누고 협박하는데도 미군 장교라는 신분에 조선 제일의 거부가 감히 어찌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너도 나도 더 크고 더 강한 나라를 등에 업으려, 그 나라가 더 크고 더 강한 존재로 조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앞다투어 나서고 있었던 것이었을 게다. 매국이라기보다는 생존본능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이미 기울어가는 아무 의미없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그런 시대의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서로 총을 겨누며 대치한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서 통역하다 말고 멱살잡이를 하고 마는 역관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조선인인 역관 개인들이야 서로에 대해 별다른 원한이나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대치가 끝나고 짜장면에 만두까지 같이 먹으면서 사이좋게 화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통역을 맡은 역관이었으니까. 그 역관의 말을 다시 미군에 통역하고 미군의 말을 역관에 전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니까. 그들의 뒤에 있는 일본과 미국의 존재가 그들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까지 지배한다. 그것이 조선의 현실이다. 더이상 조선에서 조선인들은 주인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방의 열강들이 조선과 조선인의 삶과 운명을 결정하고 있었다. 차라리 크게 웃고 싶어질 정도로 처참하지 않은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을 외국에 팔아먹으려는 매국노의 존재가 조선인 스스로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으려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외국의 사정에 의해서가 아니다. 조선 스스로가 가진 모순에 의해서다. 그래서 조선에 분노하고 조선을 원망하며 조선을 망하게 하려는 조선인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영리하게도 김은숙 작가는 자신의 장점이 아닌 역사의 서사를 자신의 장점인 개인의 삶에 맡기려 한다.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 역사의 서사로 이어지는가. 개인의 삶과 선택이 어떻게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이어지는가.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다. 과연 5백 년 넘게 이어온 조선의 역사에 그저 망해야 마땅한 안좋은 것들만 있었겠는가.
어쩌면 그래서 크게 비중도 없는 신미양요를 묘사하는데 그리 많은 돈과 노력을 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지는 싸움이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당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조선의 무지렁이들은 자기 목숨까지 내던져가며 이방의 군대와 싸우고 있었다. 조정마저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 나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추레한 몰골의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이방인의 총탄에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전투는 유진 초이(이병헌 분)가 추노로부터 도망치던 가운데 있었다. 그 전투가 끝나고 유진 초이는 미국 상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고 있었다. 그래서 5백년이나 이어진 나라에서 아무리 비천한 노비의 신분이었어도 유진 초이에게는 그저 안 좋은 일들만 있었는가.
주인이던 김대감 일가에 부모를 잃은 원한 만큼이나 도망친 어린 노비이던 자신을 도와준 황은산(김갑수 분)의 은혜 또한 매우 깊다. 하필 그 황은산이 조선인을 모아서 비밀스런 결사를 이끌고 있다. 필경 나라의 위기에서 황은산의 조직은 미국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유진 초이와 한 번은 부딪히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때 유진 초이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그때도 그는 여전히 유진 초이일 것인가.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위기에 있던 구동매(유연석 분)를 구해준 고애신처럼. 물론 아직 구동매에게 조선에 대한 감정과 고애신에 대한 감정은 철저히 구분되어 있다. 그래도 구동매에게나 유진 초이에게나 고애신은 단 하나 조선에서 사랑하고 지켜야 할 존재일 것이다. 그리고 고애신은 조선의 기득권으로서 조선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 서 있다.
같은 양반이다. 그것도 조부대부터 깊은 유대를 맺어 온 내로라 하는 명문가 출신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애신은 그런 명문가의 후예로서 마땅히 조선을 지키고자 한다. 조선을 지키는데 한 몫 거들고자 한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김희성(변요한 분)은 방관자이기를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조차 비겁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발 물러난다는 것은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형편없이 망가지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다.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옷이 구겨지고 몸에 때가 묻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작가의 설정이나 배우의 묘사가 너무 적절하다. 그의 여유는 마치 여우의 여유와 닮았다. 일본인들에 무시당하면서도 다른 조선인들과는 다르다며 위안삼던 조선의 지식인들을 너무 닮았다. 그런 김희성에게 있어 역시 고애신이란 어떤 존재일 것인가.
그러고보면 역사상 많은 문명에서 땅을 여성으로 의인화하고는 했었다. 그리스 신화의 가이아까지 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터전인 땅은 마치 어머니처럼 여겨지고는 했었다. 그래서 고애신이었던 것일까? 유진 초이와 구동매, 김희성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남자들이 하나같이 고애신을 중심으로 모이게 된 것이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관자에서 그래도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삶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주체로서 그들의 운명은 고애신을 통해 어떻게 어디까지 연결될 것인가.
여전히 답답하다.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그들의 삶이, 운명이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각자 개인의 사정과 개인의 욕망과 개인의 고집이 또다른 삶의 씨줄과 날줄을 엮어낸다. 그럼에도 사람은 살고 사람으로 인해 사건들은 일어난다. 누군가는 사랑도 하고, 그 사랑에 고민하고 신음도 하며, 한 편으로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는다. 하필 그 공간이 그 시대 한 가운데 있다. 시간은 빨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