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 조선을 지켜야 하는 사소하고 하찮은 이유들
유진 초이가 조선을 돕고자 하는 것은 대단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자신도 조선에 대해 좋은 기억은 없지만 조선 역시 비천한 노비 출신인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 기껏 조선출신 미국인이라고 자신을 부른 황제마저 노비의 자식이라는 말에 태도를 달리하고 있다. 원망을 품고 조선을 등진 이를 과연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도 단지 조선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은 조선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래서 카일 무어가 유진의 주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조선출신인 유진에 비해 영국인을 선조로 둔 순수한 백인이면서 미국인인 카일은 때문에 조선에 대해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다. 구한말 조선을 찾았던 수많은 외국인들처럼 카일 역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왕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조선의 백성과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카일 역시 조선의 백성과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만 조선의 황제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공경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말한다. 굳이 어렵고 힘든 길을 가지 말라. 자신을 위해 즐겁고 행복한 길을 선택하라.
역적이 되겠다던 장승구가 굳이 외세로부터 조선을 지키고자 위험하고 비밀스런 싸움에 자신을 내던진 이유였다. 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조선을 위한 것이다. 자신과 같은 조선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어쩌면 양반인 고사홍과는 그 목적부터 다를지 모르겠다. 내가 사는 나라니까. 내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백성들일 테니까. 자연스런 이유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진 초이 또한 고애신이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어쩌면 자신을 망칠지 모르는 위험한 일에 몸을 담그고 만다. 고애신이 지키고자 하는 나라이기에, 그리고 어느새 조선으로 돌아와 만나게 된 인연들로 인해 유진에게도 조선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생겨났다. 미국 유진 초이가 아닌 개인 유진 초이로서. 카일은 그런 스스로를 시인이라 칭한다. 그런 자신의 삶을 시로 빗댄다. 자신의 삶은 오로지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여 자신이 완성한다. 자신이 만들어가며 자신이 책임진다. 누구의 것도 아니라.
그렇게 개인의 이유로 만난다. 고애신이 유진 초이를 만난 것도 애국심 때문이 아니었고, 유진 초이가 고애신과 다시 만나고자 한 것도 망해가는 조선에 대한 걱정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조선인 첩자를 잡기 위해 쫓고 있던 중이었다. 일본의 낭인으로서 일본 공사관의 의뢰로 그동안 게이샤로 위장하여 일본의 기밀을 빼낸 조선인 첩자를 잡기 위해 밀항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던 제물포를 샅샅이 뒤지고 있던 중이었다. 몰라 볼 수 없었다. 아무리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어도 모르기에는 고애신을 향한 구동매의 마음이 너무 깊었다. 하긴 아니었다면 구동매는 고애신의 다리가 아닌 머리나 가슴을 쐈을 것이다. 그녀를 죽일 수 없다. 그녀를 잡을 수도 없다. 그녀가 조선인 첩자를 빼돌린 일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누구에게 알릴 수조차 없다. 그녀는 자신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지만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그 사실마저 고애신은 알아 버렸다.
약혼자이지만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자신과 상관없는 고애신에 대해 김희성 역시 하나씩 알아간다. 의도하지 않아도 약혼자라는 이유로 조금씩 알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름으로 양장을 지었다. 자신에 비해 작은 치수의 양장을 벌써 몇 벌이나 짓고 있었다. 전당포에 맡겼던 할아버지의 시계가 어머니를 통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도망쳐서 될 일이 아니다. 그저 외면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극복하거나, 아니면 순순히 인정하고 따르거나. 고애신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김희성의 선택은 무엇일 것인가. 고애신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과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김희성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그마저도 결국은 개인적인 것이다. 김희성에게도 조선이란 단지 사람들에게 잔인하고 매정했던 할아버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으니.
세 남자를 대하는 모습이 모두 다르다. 구동매 앞에서 고애신은 여전히 고고한 명문가 애기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김희성 앞에서는 부당한 인습에 저항하는 당당한 개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는 한 편 유진 초이 앞에서는 낯선 서구의 문물에 호기심을 보이면서 조선의 앞날을 걱정하는 근대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는 고애신을 이루는 파편들이었다. 여전히 그녀는 명문가의 애기씨였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부당한 인습에 저항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며, 한 편으로 혼란스러운 조선의 근대를 맞이하는 근대인이기도 했었다. 그녀가 살아야 했던 시대이며 그녀가 살아가야 했던 자신의 모습들이기도 했다. 하나같이 매력적이었다. 어째서 세 남자가 한 여자에 저토록 목을 매는가. 배우 김태리도 매력적이지만 그런 모든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고애신의 캐릭터 또한 끝없이 매력적이다. 조선의 모습이 그러했을까? 이제까지의 자신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자신을 위해 고민하기도 했던 당시 조선인들의 모습이 그러했을까?
그리고 사랑을 한다. 개인적인 이유로 혼란스런 시대에 그들은 사랑을 한다. 그런 개인의 사랑이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서사에 자신을 휘말리게 한다. 거창한 애국심 때문이 아니라. 어떤 대단한 충성심이나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해야 한다고 여기기에 그리 한다. 전혀 상관없는 인종마저 다른 한 여성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미국인 카일처럼. 그들의 싸움은 그렇게 개인적이다. 그들의 사랑 만큼이나 그들의 싸움이라는 것도 어쩌면 소소한 것일 수 있다. 개인의 소소한 싸움이 거대한 역사의 서사를 이룬다. 그런 시대다. 그런 시대라 격동기라 전환기라 혼란기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매국노 이완익의 딸인 쿠도 히나와 대한제국의 궁정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다. 하필 쿠도 히나를 통해 대한제국은 유진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쿠도 히나 역시 유진 초이에게 어떤 식으로 조선의 궁정으로 비밀리에 들어갈 수 있는가 조언하고 있었다. 의외의 반전이 숨어있을지 모르겠다. 혼란스런 시대에 한 가지 모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점점 더 복잡해진다. 총격도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