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판사님께 - 양아치 한강호가 법복을 입은 이유
정의감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잘못된 일에는 당연히 분노할 줄 알고,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는 부끄러워 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의 사정과 사연을 앞세우면서, 정작 자신은 뒤로 물릴 줄 아는 것이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바로 맹자가 말한 사단의 내 식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분노와 수치와 동정과 겸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강호의 경우는 겸양이라기보다 자기비하라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별 것 아니었다.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만큼 송소은과 그녀의 가족이 겪은 일들을 듣고 자기 일처럼 분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백지수표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가 알고 돈만 받고 도망치려 한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는 판사 한수호도 아니었고, 더구나 송소은이 오롯이 믿고 따르는 것도 양아치인 한강호가 아니었다. 누구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은 때로 장점이다. 판사 한수호로서 지켜야 할 대단한 것이 있는것도 아니고, 양아치 한강호를 섣부르게 앞세울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누구라도 될 수 있는 만큼 책임도 돌려질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자신을 오롯하게 믿으며 바라봐 주는 송소은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그러니까 바로 양아치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법전을 줄줄 외우며 고고하게 법리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아닌 평균 이하의 상식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하류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평범 이하의 인간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 상식이란 무엇인가. 도덕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인가. 학벌 좋고 유학까지 가서 대단한 많은 것들을 배우고 돌아온 상류층 인물들과 대비된다. 정작 세상의 정의와 질서를 말하는 법을 배우고서도 전혀 동떨어진 삶을 사는 대부분 법조인들과도 대비된다. 그래서 양아치 한강호였던 것이다. 판사 한수호가 아닌 양아치 한강호가 법정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회의 법이, 상식이, 진실이, 정의가, 윤리가, 양심이 과연 어디까지 추락해 있는가. 그 수준이란 얼마나 비천하고 비참한 수준인가.
물론 한강호도 그리 정의로운 인물은 아니다. 전과도 몇 개나 있고 그 대부분이 파렴치한 잡스러운 범죄들이다. 하지만 그런 한강호마저 아는 정의가 있다. 그런 한강호마저 외면하지 못하는 양심이, 진실이 있다. 하필 최근 판사들이 연루된 파렴치를 넘어 반사회적인 범죄가 이슈가 되고 있는 중이라. 그런데도 전혀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고 법원이라고 하는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눈치마저 보지 않고 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법복을 벗고 교도소에서 아무나 한강호같은 놈 하나 데려다 앉히고 대신 판사를 시키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진짜 그러라는 뜻이 아니라 송소은의 눈으로 본 법조계와 한강호의 모습이 시청자의 눈에 비친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너무 진지해지지 않게 상업드라마로서 살짝 어설프게 마무리하는 것도 제작진의 센스였을 것이다. 한 주의 한가운데인데 드라마가 너무 심각하면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진다. 그것 때문에 잠시 보는 것을 그만둘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한수호가 한강호가 사용하는 자신의 핸드폰과 카드를 정지시키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한강호도 떠날 결심을 한다. 실제 떠날 것처럼 보였다. 어차피 한수호가 받은 돈이니 자기가 그 돈을 가지고 도망쳐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하필 송소은 때문에. 그녀를 아프게 한 그들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신을 믿고 지켜봐 주는 그녀가 있기 때문에. 무모하다. 판사징계위원회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모해 보인다. 비슷한 무렵 한수호의 필사적인 변명은 그러나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다.
결국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송소은도 언니와 만난다. 언니와 한수호와의 악연도 확인한다. 마지막 재판을 하게 되는 것은 한수호일까? 한강호일까? 어느 쪽이든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 순간 한강호를 지탱해 주는 것은 송소은이지 않을까. 의지할 곳 없이 그저 방황하던 한강호의 삶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것도 오로지 그녀 뿐이지 않을까. 구원이란 사랑이다. 아가페든 에로스든. 아직은 좀 남은 이야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