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갈수록 우울해지는 역사, 구동매 총에 맞다

까칠부 2018. 9. 2. 10:47

그나마 이토 히로부미가 온건파였다. 아니 그보다는 더 악랄하게 차근차근 조선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려 뼈째 삼키려 들던 신중파였다. 바로 이완익이 그같은 이토 히로부미의 입장을 대변한다.


"조선이 그리 쉽게 날로 먹어질 것 같니?"


물론 그것은 막 근대화를 마치고 제국주의의 막차를 타려던 일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간다. 조선은 너무 만만했고 러시아까지 일본은 너무 대단하게 여겨졌다. 아마 유진 초이와 마주친 일본의 젊은 군인 모리 다카시는 그런 일본내 강경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 조선은 어차피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지금 당장 조금이라도 빨리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하필 고사홍으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의 수족인 이완익이 일본 공사 하야시로부터 압박받는 상황에 모리 다카시는 고애신이 다니는 학당의 미국인 교사를 체포하고 할아버지 고사홍의 집을 수색하며 등장하고 있었다.


사실 전제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것은 연산군같은 폭군이 아닌 세종같은 성군일 것이다. 당장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고 잘 살게 해주는 자애롭고 뛰어난 임금이야 말로 전제군주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준다. 백성을 억압하고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폭군의 존재는 그렇기 때문에 전제군주가 사라져야 하는 이유가 되어 주는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유럽의 군주들이 스스로 국민의 종복이며 백성의 어버이이기를 자처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전제군주인 자신이 바로 백성의 보호자이며 따라서 백성들은 자신에 복종함으로써 안전과 부귀를 누릴 수 있다. 물론 대개는 현실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계급에 의해 전제군주들은 왕위를 잃거나 아니면 군주로서의 실권을 내려놓게 되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추구했다는 조선에 대한 온건책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는 같은 아시아의 국가로서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고 서구의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일본을 동경하여 그를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자발적인 친일파가 되어 가던 상황이었다.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뭉쳐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하자. 태평양전쟁 당시 많은 아시아의 나라들이 열강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과 연합하려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므로 일본은 아시아의 중심이며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민족들은 일본을 본받고 따라야 한다. 비유하자면 과거 동아시아의 질서에서 중화가 차지하던 자리를 일본이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을 종주국삼아 나머지 아시아의 나라들이 그 동맹국이라기보다 위성국으로 수직적으로 재배열된다. 사실상 대한제국 황실만 있을 뿐 모든 권리는 일본이 가지는 허수아비 괴뢰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일제강점기 말에 그랬듯 조선이라는 민족을 지우고 일본의 일부로 만들어간다.


조선은 일본에 비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당장은 인구도 많고 영토도 더 크고 먼저 근대화까지 이룬 일본이 힘으로 조선을 눌러 병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조선이 그에 반발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힘으로 누르고만 있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구의 열강들조차 압도적인 국력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반발과 저항을 모두 누를 수 없어서 끝내 제국주의 정책을 포기해야만 했었다. 식민지에서 얻어지는 경제적인 이익보다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과 수고가 더 커지는 순간 더이상 식민지를 유지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당장 대한제국을 강제병탄하고 불과 9년만인 1919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며 제국주의 일본에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반대로 3.1만세운동에 놀라 식민지정책을 바꾼 1920년대 이후 조선은 급격하게 일본화되고 있었다. 무엇이 더 한국의 입장에서 무섭고 치명적인가. 하긴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강제적인 민족말살정책조차 사실은 조선내부에서 일본에 대한 반감만 더 키우는 결과를 낳고 있었다.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반감은 거의 이 시기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다.


이완익이 뒤로 물러나고 모리 다카시가 전면에 나선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족인 이완익이 물러난 자리를 하필 군인인 모리 다카시가 대신하려는 듯하다.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의 앞잡이가 된 이완익이 아니라 일본인으로서 당연히 조선을 자신의 식민지라 여기고 조선말까지 철저하게 배워 익힌 일본군인이다. 아마 전주 보았던 일식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운명처럼 대한제국의 앞에 놓인 예정된 결말이 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품고 웃으려 하던 젊은 유진과 고애신, 그리고 김희성 등을 옭죈다. 그런 와중에 구동매는 총을 맞는다. 입으로 피를 토하는 것으로 봐서 내장을 상한 듯한데 과연 당시 의술수준으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이대로 가장 빨리 허무하게 퇴장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당시 조선이 가진 명과 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칫 죽을 것을 알면서도 서로 앞장서서 나라를 위한 상소에 이름을 올리려는 선비들과 그런 가운데 문중의 안위만을 앞세워 그 맨 앞에 꿇어 엎드린 고사홍을 비난하는 문중 인물들의 모습은 선비이면서 한 편으로 양반이었던 당시 조선 지배층의 모순된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실제 그랬었다. 입으로는 나라와 국왕에 대한 충성을 외치면서도 결국은 집안이었다. 가문이었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 한창 입바른 소리를 떠들다가도 가문의 이름이 나오면 그대로 침묵하고는 했었다. 전국의 의병이 모여서 한양을 바로 앞에 두었는데 모친상을 이유로 낙향해버린 양반의병장의 이야기가 괜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런 한 편으로 지배층인 국왕과 관료들을 원망하면서도 끝내 조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안위마저 내던졌던 민초들이 있었다. 구한말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많은 평민의병들이 나타났던 시기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과연 당시 조선은 어떤 나라였었는가.


어느새 유진 초이와 고애신의 사랑은 그런 시대에 짓눌리기라도 한 듯 비중이 약해지고 있다. 아니 이미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할아버지인 고사홍에게도 알렸고 약혼자인 김희성으로부터 파혼도 받아냈다. 하지만 고애신의 마음은 대한제국에 있고 유진 초이도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굳이 무관학교 교관을 맡아 고애신의 동지가 될 지 모르는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1907년 고종이 퇴위되고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을 때 해산된 군인들의 의병들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봉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거기까지 드라마가 이어지기는 할까. 그나마 이완익까지는 그렇게 불안하지 않았는데 모리 다카시의 존재로 인해 해피엔드에 대한 미약한 기대마저 사라질 지경이다.


시대가 급하다. 사람들도 마음이 급하다. 히나의 펜싱 교사가 사실은 일본의 앞잡이였었다. 유진의 양아버지인 선교사도 그가 빼낸 정보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었다. 구동매는 총을 맞았고, 히나는 어머니 찾기를 중단한다. 유진은 옛친구이자 새로운 적을 고애신의 집에서 만난다. 새로운 적은 조선의 명문가인 고사홍의 집마저 아랑곳않고 뒤질 수 있는 인물이다. 유진과 고애신이 한 자리에 있는데 그들은 서로를 볼 여유조차 없다. 참 사람 염장도 잘 지르던 커플인데 어쩔 수 없이 시절이 급박하게 흘러간다. 


보지 말까. 결말이 우울할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지켜보는 것도 참 못할 짓이다. 더 우울해질 것을 알면서도 끝내 기다려가며 봐야 하는 것도 차마 할 짓이 못된다. 그들은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 김희성은 과연 오롯이 자신의 길을 찾아 걸을 수 있을까. 모두로부터 사랑받는다.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성격이다. 누구에게나 진심이다. 다만 아직 자신에게만 진심이지 못하다. 역사가 우울하다. 보기가 싫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