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 마지막을 위한 준비, 화정그룹을 상대로 큰 그림을 그리다
결국 화정그룹 회장의 지시로 구승효가 사들인 병원부지가 대자본인 화정그룹을 옭아맬 덫이 되는 것인가. 처음부터 환경부장관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부터 이것을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화정그룹과 환경부 사이에 부정한 거래가 있었고 그 사실이 밝혀질 경우 화정그룹이라도 타격이 있을 것이다.
확실히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화정그룹 회장이 전면에 나서며 빛이 바랬지만 원래부터 구승효는 보통 수단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악랄할 정도로 치밀한 인물이었다. 기껏 구승효를 공격하기 위해 찾아낸 병원경영상의 불법적인 내용들마저 어느새 말끔히 합법으로 바꾸어 놓고 오히려 우월한 위치에서 의사들에게 역공을 가하고 있었다. 고작 의사들이 떠올릴만한 것들이야 자기가 한 발 앞서서 모두 처리하고 해결한 뒤 의사들을 더 궁지로 내몰 수 있다.
하긴 평생을 병원에서 환자만 치료하던 사람들이다. 당장 드라마에서도 성실한 의사일수록 환자를 치료하고, 새로운 논문들을 찾아보고, 자기연구를 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나마 오지랖넓은 예진우조차 대부분의 시간은 응급실에서 응급환자를 치료하며 보내고 있는 중이다. 주경문 역시 예진우와 얽히기 전까지 심지어 수술실에서 먹고 자는 것이 일상이었을 정도다. 새삼 구승효를 상대로 무언가를 해보려 한다고 과연 살벌한 기업경영의 최전선에서 온갖 실전을 겪으며 단련된 구승효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하물며 그 구승효마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화정그룹의 회장이다.
처음부터 안되는 싸움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곧 힘이고 명분이다. 바로 그 대자본인 화정그룹이 상국대학병원을 소유하고 있고, 의사들을 비롯한 병원직원들의 월급마저 그 화정그룹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상태다. 그렇다고 싸움을 영리하게라도 하면 모르는데 너무 서툴러서 매번 구승효의 손바닥 위에서 농락당하기 일쑤였다. 구승효 하나도 이렇게 어려운데 과연 화정그룹 회장까지 직접 나서면 어떻게 될까? 드라마에 대한 흥미가 어쩔 수 없이 식게 되는 이유였다. 구승효 뒤에 화정그룹 회장까지 있는데 주경문이든 예진우든, 심지어 병원장 오세화마저 그들을 상대하기에 너무 서툴고 약하다.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설마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화정그룹을 상대로 함정을 파놓았을 줄이야.
하긴 단서는 있었다. 의사들 스스로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던 자부심 만큼이나 그들 또한 정도만 다를 뿐 대한민국 사회에서 당당한 상류사회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무기로 한때 구승효와 맞서려는 궁리도 해 본 적이 있었었다. 암센터장 이상엽의 처가 가운데 공무원이 - 그것도 환경부의 내부사정까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까지 적지 않았었다. 언론을 통해서도 보도되지 않은 사실들이 그렇게 암센터장을 통해서 주경문과 예진우에게 전해진다. 물론 어쩌면 그 배후에는 환경부장관까지 노린 공직사회 내부의 다른 사정이나 이유가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거나 처음부터 준비된 무기가 다시 주경문과 예진우 두 사람에게 주어졌다. 비로소 화정그룹까지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준비가 마쳐졌다.
그리고 또 하나 구승효는 처음부터 바뀔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는 자신의 말처럼 지키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구승효가 취임하기 전 그가 사장으로 있던 운수회사에는 자살자가 끊이지 않았었다고 한다. 구승효가 원인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과거형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화정그룹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도록 자신이 선제적으로 상황을 만듦으로써 오히려 직원들을 지킬 수 있다. 마치 화정그룹 회장이 직접 나서려 하자 자기가 먼저 주경문과 예진우, 이노을, 심지어 병원장 오세화까지 해고하여 그를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이미 병원에서 해고되어 쫓겨난 뒤인데 굳이 회장그룹에서 직접 손을 쓸 필요까지는 없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껏 그토록 이노을이 애썼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바뀐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은 이미 바뀔 필요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여튼 그런 점에서 이노을도 어리기는 어리다. 앞서 말한 너무 의사로서의 사명에 충실했던 탓에 하다못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예선우의 감정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회성이 부족해진 때문일 것이다. 기껏 주변의 인간관계라는 것이 동기인 예진우와 그 동생 예선우 정도다. 병원에서도 주경문 정도나 친하게 지낼 뿐이다. 자기가 구승효를 마음에 두고 있는지. 구승효가 자기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그런 상황에 자기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하긴 처음부터 예선우가 이노을을 보고 누나라 부르는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었다. 하여튼 산전수전 다 겪은 괴물인 것이다. 아무리 이노을이 나서도 결국 바뀌든 안바뀌든 선택도 결정도 구승효 자신이 하는 것이다. 굳이 실망할 이유도 실망했다고 화를 낼 이유도 없다.
결국 병원 안에서의 싸움은 어렴풋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은데 예진우의 가족이야기는 그저 지지부진할 뿐이다. 솔직히 그다지 관심도 없다. 그만큼 병원에서의 싸움이 더 흥미진진한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예선우가 배신해서 자고 있는 예진우의 목에 칼이라도 꽂지 않는 이상 치열한 싸움 한 가운데 감상적인 가족이야기는 한없이 지루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예선우의 캐릭터 형성에 실패했다. 예선우의 비중을 지금보다 더 키우던가 아니면 더 줄였어야 했다. 그 애매함이 부대낌으로 거슬림으로 여겨진다.
어찌되었거나 끝이 보인다. 반격의 여지가 보인다. 드라마는 판타지다. 현실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기에 굳이 드라마를 보려는 것이다. 해피엔드야 말로 가장 큰 반전이다. 밑준비는 모두 끝났다. 선도 악도 승자도 패자도 없는 이 지겨운 싸움을 끝낼 때가 되었다. 마지막은 통쾌할 것이다. 그리 믿는다. 한 주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