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고사홍의 죽음과 고애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

까칠부 2018. 9. 9. 05:31

고사홍은 조선이다. 고애신이 지키고자 하는, 그리고 고애신을 옭죄고 있는 오래고 낡은 조선 그 자체다. 하나의 시대가 끝난다. 하나의 세계가 종막을 고한다. 이제 조선은 끝이다.

 

이완익이 고사홍을 능욕한 순간부터, 이완익을 지키기 위해 고종이 고사홍을 감옥에 가두고 이완익에 의해 그 집마저 허물어지는 그 순간 사실상 조선은 끝난 것이었다. 조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고고한 늙은 선비가 자신이 지키고자 한 나라로부터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마지막 가는 길마저 철저히 모욕당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의 황제도 백성들도 존경하는 늙은 선비 하나 지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용케 참았다 싶게 모라 다카시의 일본군이 더 거침없이 몰아치듯 조선을 유린하기 시작한다. 주모가 죽고 그 시신이 백주대낮에 한양거리에 처참하게 내걸린다. 고사홍의 49제에 참석한 문중사람들에 대래 무차별적인 총격이 가해진다. 비무장에 단지 도망치려는 것 뿐이었고, 더구나 그래도 나름대오 행세하는 양반들일 테지만 일본군은 그런 것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김희성마자 죽을 뻔했다. 황제 다음으로 부유하다는 집안의 배경조차 장차 자신들의 지배 아래 놓일 식민지의 미개한 백성이라는 사실보다 앞에 놓이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 죽이고 다 빼앗아도 지켜 줄 정부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일본 정부만 허락하면 누구도 자신들에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다.

 

설마 싶었다. 이대로 김희성이 주요인물들 가운데 가장 먼저 죽는구나. 구동매 역시 자신이 속한 조직 무신회의 오야붕이 직접 일본에서 조선으로 건너오고 있었다. 이제 구동매는 무신회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따르기 싫으면 배신자에 반역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 초이는 주모의 시신을 사이에 두고 일본군 대좌 모리 다카시와 마주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사홍이 죽기 전 유진에게 모리 디카시를 죽여달라 부탁했었을 터다. 이것이 시대만큼이나 비장하고 비극적인 세 남자의 운명일 것인가. 카타르시스였다.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가운데 의병들이 나타나 김희성을 구하고 도리어 일본군을 몰살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고애신이 있었다.

 

살라고 했다.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으라 했다. 고사홍이 조선의 과거라면 고애신은 조선의 미래다. 어떤 수모와 굴욕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 조선의 내일을 보아달라. 아니 그런 당부조차 아니었다. 그런 것은 죽지 않고 살아만 있으면 당연히 보게 될 결과였다. 조선이 영영 일본의 일부가 되든, 아니면 언젠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든, 살아만 있으면 무엇이 되었든 저 앞에 기다리고 있을 미래를 직접 현재로써 보고 겪게 될 터였다. 그때까지 살아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미래이든 젊은 그들이게 맡긴다. 그리고 젊은 고애신은 그 내일을 위해 싸울 것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해피엔드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이유다. 대한제국이 강제병탄되었다고 끝은 아니었다. 비록 대한제국은 주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의 자주적인 역사가 아예 끝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잠시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강점기가 있었지만 이내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광복이 이루어졌다. 그때까지 무수한 조선의 의사, 지사, 열사들 조선의 광복을 위해 일본과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싸움도 지켜봐야만 한다. 그리고 마침내 고사홍이 당부한대로 다시 조선의 광복도 맞이해야 한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과정일 테지만 결코 죽음으로 도망치거나 포기하려 해서는 안된다. 다만 만주일까? 상해일까? 아니면 미국일까? 그 전에 부모와 할아버지의 원수는 갚을 수 있을까?

 

작은 승리다. 이미 결정된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기에는 너무 작은, 의미조차 부여할 수 없는 승리다. 그래도 이겼다. 고애신마저 잡으려는 저들의 집요하고 치밀한 의도를 역이용해서 저들의 잔혹하고 무도한 폭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함정을 파고 거꾸로 철저히 응징한다. 하마트면 죽었을 사람들을 살려낸다. 아직 조선에는 황은산이 있고 고애신이 있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김희성도, 구동매도, 유진 초이에게도 지금 것들은 그저 역사라는 큰 흐름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은 승리만큼이나 너무 미미한. 누군가는 그 앞에 좌절할 것이고 누군가는 살아남아 역사를 돌아 볼 것이다. 백 년도 더 지난 지금의 시청자와 저들의 절박하고 간절한 현실을 이어준다.

 

어차피 예정된 결과다. 이미 역사로써 결정된 수순이다. 그럼에도 당시를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현재이고 현실이다. 그래도 그런 와중에도 아주 작은 승리나마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의미없는 단지 감정적인 만족일 뿐이라도 통쾌함을 느끼고 싶다. 무엇보다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이대로 끝이 아니다. 살아남은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총을 겨누며 나타난 고애신은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