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야샤 - 일본에 유독 귀신이 많았던 이유
군대 있을 때 소대장 하나가 한밤중에 귀신을 봤다고 생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순찰 도중 외진 초소로 가는데 울타리에 농가에서 날아온 비닐이 걸려 펄럭거린 것이었다. 어두운 밤 인적도 없는 오솔길에서 희끗한 비닐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그만 귀신이라며 정신을 놓아 버린 것이었다.
원래 공포란 그런 것이다. 아마 나이 좀 있는 사람이면 예전 '전설의 고향'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전설의 고향'에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흉측한 분장을 한 귀신이 아닌 귀신이 나타나기 전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삐이걱- 끼익- 기괴한 마찰음이 이어지며 스르륵 문이 열리고 화면이 움직인다.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에 오히려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해 없는 공포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사실 외국에서도 공포물을 만들 때 흔히 쓰는 고전적인 테크닉일 것이다.
공포와 증오는 인간이 가진 감정 가운데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두 가지일 것이다. 공포와 증오는 누구 때문도 아니고 무엇 때문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동기와 이유로 인해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재생산된다. 시작은 있을 지 몰라도 끝은 없다. 좋아도 밉고 잘해도 밉고 밉지 않아서도 밉고 그래서 마침내는 미운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무서우니까 무섭고 무섭지 않아서 더 무섭고 그래서 무서운 이유와 대상마저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것이 요괴다. 귀신이다.
세상에 없으니까. 어차피 현실에는 존재치 않을 테니까. 그런데 무서워야 하니 없는 대상도 만들어내야 한다. 모두가 자신의 공포를 공유할 수 있도록. 내가 느끼는 무서움과 두려움을 모두가 같이 느낄 수 있도록. 그런 점에서 귀신은 그것을 만든 자신의 공포를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무서워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있는가. 이를테면 90년대 초반 어느 드라마에서 거동이 수상하다며 간첩이라 신고하고 무고라 하자 발악하듯 소리지르던 어느 여자캐릭터도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적화통일하려 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대한민국을 적화하려는 간첩들이 암약하고 있다. 하필 그 여자캐릭터의 아버지가 그렇게 간첩혐의를 받고 잡혀갔다가 죽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90년대 이전까지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공포는 북한이었고 북한이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기 위해 파견한 간첩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있다.
경제가 어렵다더라. 경제가 망해간다더라.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현대의 귀신들을 보다 구체적인 형상을 띄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느끼는 것을 똑같이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전처럼 현실에 없는 기괴한 모습의 요괴나 귀신으로는 더이상 설득력이 없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직접적인 숫자나 사실처럼 보이는 사례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다. 이른바 가짜뉴스란 것이다. 같은 공포를 공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그같은 가짜뉴스들은 때로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어차피 현실에 없을 귀신이나 요괴들이 실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제는 어렵고, 자신들의 삶도 위태롭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전통적인 이야기구조에서도 귀신이나 요괴를 퇴치하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어째서 일본에는 신이 그토록 많은 것일까. 신만 많은 것이 아니라 요괴도, 귀신도, 도깨비도 많다. 하나같이 흉악하고 잔인하다. 그에 비하면 한반도의 귀신들은 참 귀엽다. 그나마 처녀귀신이 한을 품고 제법 독하게 굴 뿐 그조차 신임사또가 나타나면 거의 바로 해결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바로 이 부분 귀신들마저 관리를 찾아가 원을 풀어줄 것을 청하고 관리의 도움을 받아 한을 풀면 그대로 승천해버리는 구조가 중요하다. 지나가던 도력 높은 스님도 무술이 뛰어난 협객도 거의 필요없다. 용기있고 신념이 올바른 청렴한 관리라면 귀신도 퇴치되는 것이 아니라 원한을 풀고 원래의 길을 가게 된다.
일본의 대중문화에서도 유독 귀신이 많이 등장하는 시대가 언제인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일본사회가 혼란스럽던 시대다. 전국시대야 다이묘들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웠고 그 이전에도 쿄에 모인 소수 귀족들의 사치를 위해서 일본전역이 수탈당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지방 가운데는 아직 조정의 지배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 있었고, 아직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도적마저 들끓고 있었다. 조정에 반발한 백성이나 무사들의 봉기와 반란 역시 끊이지 않았다. 일본사회가 안정을 찾게 된 것은 전국시대가 끝나고 에도바쿠후가 일본을 통일한 뒤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진이나 태풍, 해일 등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는데 정치마저 안정되어 있지 않으니 그같은 현실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사람과 사람을 거치며 구체적인 형상을 띄게 되었던 것이었다.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폭하고 흉악한 무언가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고려말의 혼란기에도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불가사리라는 괴물이 나타난 바 있었다.
하필 전국시대다. 카고메와 이누야샤가 나라쿠를 쫓으며 헤매고 있는 것이 딱 전국시대의 후반이다. 오다 노부나가를 오와리의 멍청이라 부르는 것으로 봐서 아직 가독을 상속하기 전인 것으로 판단된다. 조정이 있는 쿄가 폐허가 되고 구심점을 잃은 지방의 다이묘들이 저마다 세력을 키워 하루가 멀다고 싸워대던, 그를 위해 백성들을 수탈한 끝에 인신매매까지 일삼던 인세의 지옥과도 같은 시대였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전국시대와 같은 난세가 없어서 이야깃거리가 없다 한탄하기도 하는데 그냥 철없는 아이의 헛소리로 치부하면 된다. 다이묘들의 삶은 화려하고 역동적이었을지 몰라도 그 밑에 신음하던 백성들의 처지는 그보다 더 비참할 수 없었다. 그런 백성들의 처지가 귀신을 불러왔다. 그들은 자연재해였고, 자신들을 수탈하던 다이묘였으며, 절망스럽던 현실 그 자체였다. 그런 난세가 나라쿠라는 요괴를 키운다.
백성들을 지배하는 다이묘란 요괴가 가진 힘 앞에 그저 무력할 뿐이었다. 백성들을 위해 요괴와 싸우지도 요괴를 물리치지도 못한 채 오히려 요괴들에 이용당하기 일쑤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힘으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한반도의 전래설화였다면 요괴가 날뛰기 시작하면 조정에서 관리부터 내려보냈을 것이다. 바로 그런 부분들이 어쩌면 한국인과 일본인의 기질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가 생각하게도 된다. 한국사람들은 때로 근거없이 낙천적인 반면 일본인들은 상당히 체념적이고 순종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대중문화에서도 그런 경향이 많이 보이는데 한국 대중문화에서 주로 현실의 어두운 부분을 담은 스릴러가 발달한 반면 일본 대중문화에서 판타지가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판타지란 장르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보다 포괄적 의미의 판타지다.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현실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 나 역시 제법 된 듯하다.
요괴란 퇴치해야 하는 존재지만 한 편으로 인간보다 우월한 어쩌면 신적인 존재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이누야샤의 아버지가 그런 경우이고 셋쇼마루 역시 그많나 힘을 보이고 있다. 인간이 될 것인가? 신이 될 것인가? 인간인가? 인간 이상의 존재인가? 사실은 그들이 만나는 요괴란 요괴가 아닌 요괴와도 같은 현실은 아니었을까. 그냥 만화를 보면서 들게 된 쓸데없는 생각들일 것이다.
한때 읽다가 지겨워서 그만두었는데 요즘 완결된 지 꽤 되었다는 말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진도는 나가지 않는다. 그만큼 피곤한 때문이다. 일도 많고 정신적으로도 여유가 별로 없다. 중간에 포기한 이유가 있다. 다카하시 루미코 만화는 어느 지점에서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부분이 있다. 생각이 많았다. 마저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