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달 푸른 해 - 가족, 사랑, 그 덧없는 이름들을 향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을까? 절대적인 것이 어디 있을까? 남녀의 사랑도, 부부의 정도, 천륜이라는 가족의 유대마저도. 설마 제 피를 이은 아이를 그리 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실제 그리 대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죽도록 사랑하다가도 어느새 마음이 식으면 헤어지는 것이고, 아무리 부부의 정이 깊어도 아주 작은 사소한 이유로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그렇게 버려지는 아이와 방치되는 아이들이 있다. 그래서 스산하다.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 남편이 남기고 간 돈에 오히려 환한 웃음을 짓는 너무나 현실적인 아내의 모습이. 인간이란 어쩌면 이리도 추레하고 슬픈 존재인 것일까?
차우경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였다. 정확히 차우경이 불편하기보다 그녀를 불편하게 여기는 자신을 더 불편해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선이란 가장 지독한 에고일 수 있다 말한 적 있는 것 같다.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주변의 사정도 아랑곳 않으며, 오로지 자신의 선의에만 도취된다. 자신의 죄책감을 벗기 위해, 혹은 죽은 아이에 대한 동정심에 발벗고 나서는 사이 남겨진 남편과 아이는 어쩌라는 것인가. 인간으로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엄마와 아내로서는 어쩌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보며 나도 참 나이를 먹었구나 새삼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은 악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이 근본에 있기 때문이며, 인간의 본성이 선한데도 그 선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그러지 못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결같이 선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지독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아이와 남편을 버려둔 것이 원인이 되어 뱃속의 아이마저 잃고 남편은 지쳐 떠나가 버린다. 고작 그런 관계였다. 그들에게 가족이란. 남편이란. 아내란. 그렇게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마냥 마음이 바뀌고 사정이 달라지면 언제든지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는. 잔인하게 멀어질 수 있는. 그래서 남편의 배신에 눈물흘리는 차우경과 남편의 죽음을 기뻐하는 김여진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것이리라. 한때는 사랑했지만 잠시 같이 있는 시간조차 견딜 수 없는 강지헌과 이연주처럼. 그런 가족을 위해, 그런 사랑을 위해 사람은 때로 자기 목숨까지 걸기도 한다. 얼마나 허망한가.
그래서 과연 붉은 달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푸른 해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이대로 끝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공중파 드라마니까. 불특정다수가 보는, 그런 만큼 사회의 보편적 질서와 정의를 보여주어야 하는 공중파 드라마로서 여기서 이어지는 답이 분명 있을 것이다. 죽은 아이에게 어쩌면 자기처럼 방치된 여동생이 있을 것이다. 아니 과연 차우경을 따라다니며 보이고 있는 여자아이의 정체가 진짜 그 아이의 동생이었을까? 동생 세경이 식물인간이 됐을 때 차우경이 무너진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죽음이 이어진다. 아이를 불태워 유기한 엄마에 이어, 그 엄마를 죽였다는 의사의 자살과 또다른 자살까지. 그들의 죽음을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의 의미마저 사람마다 각자 다 다르다.
절망은 깊어진다. 막다른 길이다.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 멈춰있기엔 절망과 상처가 너무 크다. 그러나 그들의 앞에 기다릴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리 아름다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불길함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키운다. 어떻게 드라마는 시청자를 배반하고 농락하며 헤집을까?
암울하다는 말이 딱 드러맞을 것이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너무 적나라한 군상들이어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영원할 것이라 믿었던 관계가 가을 낙엽처럼 힘없이 나부낀다. 겨울이 온다. 메마르고 추운.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