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선녀와 나무꾼 - 어느 범죄자의 자기변명

까칠부 2018. 11. 27. 15:58

옛날 한 나뭇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주는 대신 선녀를 넘겨받기로 계약을 맺는다. 몰래 선녀탕으로 접근한 나뭇꾼은 사슴에게 들은대로 날개옷을 훔쳐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 그렇게 부부로 아이 셋을 낳고 살아가던 중 나뭇꾼은 다른 선녀들도 어찌해볼까 하는 욕심에서인지 날개옷을 선녀에게 보여준다. 선녀는 낼름 옷을 입고 아이들을 양팔과 가랑이에 끼운 채 하늘로 돌아간다. 남은 나뭇꾼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본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선녀탕에서 목욕하는 선녀들의 나신을 떠올렸습니다. 국민학교 무렵이니 대개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뭇꾼이 안되기는 했지만 그거야 나뭇꾼 사정이고, 더구나 몇 년이나 선녀를 마누라로 데리고 살았으니 억울할 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인지 국민학교 때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머리를 스치는 것은 선녀탕과 목욕하는 선녀들이었습니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읽으니 그때는 또 불쾌해서 못읽겠더군요. 뭐 이딴 이야기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화가 났습니다. 옛이야기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나뭇꾼이 사슴을 구해주자 사슴은 그 댓가로 선녀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음흉한 사슴입니다. 선녀들이 목욕하는 건 또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사슴 주제에 선녀들 목욕하는 것을 훔쳐봤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놈의 사슴은 훔쳐보기를 사주하는 것에서 한 술 더떠서 옷을 훔쳐서 선녀가 돌아가지 못하게 한 후 강제로 아내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하는 말버릇으로 봐서 분명 야쿠자 사슴입니다. 


선녀가 하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날개옷이 필요합니다. 날개옷이 없으면 하늘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날개옷은 무엇이겠습니까? 여권입니다. 사슴이 옷을 훔치라 한 것은 여권을 빼앗아 감추라고 말하는 것이나 같습니다. 전형적인 야쿠자나 조폭의 수법입니다. 여자들을 입국시킨 후 여권을 빼앗아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어놓고, 강제로 매춘에 종사하게 하는 아주 지저분한 수법입니다. 야쿠자 사슴이 제안한 것은 바로 그런 범죄행위입니다. 나뭇꾼은 그런 범죄행위를 사주받아 아주 태연히 저지른 겁니다. 


이미 이야기의 시작부분에 인신매매가 등장합니다. 더구나 목욕탕 엿보기를 사주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몰카를 설치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다 어떻게 퍼뜨렸는지 알 게 무업니까? 그런데 여기에 여권강탈에 의한 강제억류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이건 유인약취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으로도 정말 살떨리는 범죄물입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야기가 진행될 지 알 수 없습니다.


여권-즉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는 나뭇꾼과 결혼하게 됩니다. 원해서 결혼했는지 강간당해 결혼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선녀가 나뭇꾼이 좋아서 결혼했을 리는 없으니 후자의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을까 합니다. 어차피 여권까지 빼앗은 놈이 여자를 존중해준답시고 그냥 내버려두었을 리 없으니 말입니다. 강간범과 부부가 되는 경우는 최근까지도 꽤 적지 않게 보입니다. 웃기지도 않는 정조관념 때문입니다. 심지어 부모가 어차피 버린몸이라며 강간범과 결혼시킨 예도 있습니다. 김춘삼이라는 거지아저씨는 그걸 아주 자랑스럽게 자신의 자서전에 쓰기도 했었죠. 정말 쓰레기같은 놈입니다. 나뭇꾼이 만약 강간을 동반해서 선녀와 살았다면 그놈은 정말 오갈데없는 쓰레기 범죄자입니다. 


선녀가 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자 혼자 살아가기가 정말 힘든 시대입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근대 이전, 아니 지금조차도 여자 혼자 살아가는 것은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농사를 짓든, 나무를 하든, 약초를 캐든, 여자가 하기 쉬운 일은 없습니다. 겨우겨우 먹고살만큼 번다고 하더라도 남자들이 혼자 사는 여자를 내버려둘 리는 없을 겁니다. 곱게 자란 선녀가 그런 사정을 알 리는 없었겠지만, 최소한 먹고살기 힘들다는 것 정도는 금방 깨달았을 겁니다. 그래서 나뭇꾼을 자신의 보호자로서 남편으로 맞이했겠죠. 많은 여자들이 그런 선택을 했습니다. 여자에게 불리한 세상이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경우 선녀는 시대의 피해자가 되겠군요.


하긴 당시의 정조관념에 목욕하는 장면을 들키고, 옷까지 빼앗겨 알몸을 보였다면 이미 몸을 허락한 것이나 다름 없었을 겁니다. 그정도면 거의 갈데까지 간 것으로 봐야 할테죠. 어쩌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뭇꾼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군요. 어차피 버린 몸. 그냥 나뭇꾼과 살자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곱게 자란 여자일 수록 그런 경향이 강했으니 선녀도 그럴 수 있었을 겁니다. 혼자 살자니 살기도 막막하고 무서웠을 겁니다. 더구나 이미 버린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을테죠. 거기에 옆에서 힘으로 이길 수 없는 남자가 슬금슬금 달려듭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나뭇꾼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마도 정확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나뭇꾼이 범죄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선녀가 날개옷 받자마자 아이들 데리고 가출하는 장면입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살아온 정 때문에 억지로 이혼도 못하고 살아가는 아내들이 많습니다. 무능한 남편일수록 잘 때립니다. 술이나 퍼먹는 인간말종일수록 폭력에 의존합니다. 그렇다고 돈 잘버는 놈들은 깨끗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런 부류는 밖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보다 약자인 아내에게 풀려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우리나라의 아내들은 버팁니다. 살아온 정 때문에. 아이들 때문에. 골병이 들어가면서도 참고 버팁니다.


하지만 선녀는 다릅니다. 선녀는 날개옷 받아 챙기자마자 나뭇꾼을 버리고 하늘로 돌아가버립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사랑해서 부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좋아서 함께 살게 된 것도 아닙니다. 그나마 남았던 정도 여권을 훔쳐간 놈이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모두 배신감과 함께 날아가버렸을 겁니다. 그렇다면 더이상 나뭇꾼과 부부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아이들이야 배아파 난 자식들입니다. 나뭇꾼의 아이들이긴 하지만 선녀의 아이들이기도 합니다. 아이들만 챙기면 됩니다. 양 팔도 있겠다, 다리사이도 있겠다. 세 아이를 품을 자리가 있으면 그대로 안고 날아올라가면 되는 겁니다. 나뭇꾼이야 울던 말든 신경쓸 필요 없습니다. 이 얼마나 당당하고 과감한 모습입니까? 정말 매력적인 여자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나뭇꾼의 후회는 선녀의 과감한 행동에 비교해볼 때 정말 추해보입니다. 아이를 넷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던가요? 사슴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마디로 짐을 지워 붙잡아 보겠다는 겁니다. 아이들이라든지. 혼자 남을 자신이라든지. 친척이나 친구들에 대한 입장이나 체면이라든지. 뭐 이런저런 이유들을 내세워 부담을 지워버림으로써 여자를 강제로 붙잡겠다는 겁니다. 정말 이렇게 치졸한 놈이 다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여권 빼앗아놓고서, 이제는 모성을 미끼로 아예 떠나지도 못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선녀가 그냥 뒤도 안돌아보고 떠나버릴만 합니다. 이런 치졸한 놈 믿고 더 살아봐야 뭔 좋은 일 보겠습니까? 잘 한 겁니다.


선녀와 나뭇꾼은 아이들이 많이 접하는 전래동화입니다. 이 동화의 교훈은 인신매매와 유인약취, 강간 등으로 여자를 강제 억류할 수 있으며,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살 수 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여자 혼자 살기 힘든 세상에 혼자 떨어뜨려만 놔도 의지하러 올테니 걱정 붙들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정 여권을 돌려주고 싶으면 헤어지는 데 있어 부담으로 작용할 때까지 붙들어 놓고 떠날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을 만들어놓으라는 교훈도 추가됩니다. 말 그대로 범죄교과서입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것인지.


선녀와 나뭇꾼과 비슷한 이야기가 "하고로모 세츠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도 전해집니다. 큰 줄거리는 거의 같습니다. 아마도 고대 양국의 문화교류에 의해 전파되지 않았는가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서로 유사한 사회환경이 동시에 유사한 이야기를 구상해내었을 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야쿠자의 나라이니 어쩌면 일본이 원류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범죄조직은 순진해서 얼마 전까지도 이런 사악한 범죄는 꿈도 못꿨거든요. 나쁜 건 일본입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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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를 보니 2004년으로 찍혀 있는데, 원래는 다른 블로그에 썼다가 그 블로그 닫으면서 옮긴 것이니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문체도 그래서 지금과 상당히 다르다. 인간이 솔직해서 글을 읽으면 언제 어떤 감정으로 썼는지 스스로 너무 잘 느낄 수 있다. 


전에 썼던 '계룡선녀전'을 보다가 불편해진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장난처럼 써놓기는 했지만 내가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게 된 이유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전래동화랍시고 애들 읽으라 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러고보면 예전엔 이런 주제로 글도 많이 썼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주제까지 그때와 너무 달라졌다. 딱 그때 내가 관심을 가진 주제까지도 글에 다 드러난다. 참고로 저 블로그는 이미 망해 사라졌다. 이 블로그도 언제 어떻게 될 지 아직 모르겠다. 심심해지면 예전 글들 찾아서 하나씩 올려 볼 수도. 이런 것도 썼구나 나 자신이 신기해지기도 한다. 참 못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