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달 푸른 해 - 계속되는 차우경에 대한 의심, 그리고 또다른 의심
포커를 치는데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들어왔다. 이거면 확실히 이길 수 있다. 먹을 수 있다. 그런데 열심히 베팅하는 도중 부쩍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뭘 믿고 이리 덤비는 거지? 패가 더 좋은 건가?
의심은 더욱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상대가 타짜인 것을 안다. 도박의 프로다. 그렇다면 뭔가 숨겨놓은 수 같은 게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처음부터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딱 베팅하기 좋게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쥐어 준 것인지 모른다. 타짜라면 그런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 역시 처음부터 차우경을 범인으로 의심했었다. 차우경에게만 보이고 있는 여자아이 역시 차우경의 어린시절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모든 정황이 차우경을 가리키고 있으니 부쩍 의심부터 들기 시작한다. 그것도 사악할 정도로 영리하고 사기적일 정도로 치밀한 작가가 쓰고 있는 작품이라면. 그렇게 쉽게 자기가 공들여 쓰고 있는 이야기의 답을 시청자가 넘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함정을 파고 미끼를 던져 시청자를 엉뚱한 곳으로 유인하고 마지막에 시원하게 뒤통수를 친다. 그게 스릴러의 맛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리 벌써부터 이렇게 쉬울 수 있을까?
둘 중 하나다. 차우경이 범인이 아니거나, 아니면 범인이 누구이든 처음부터 전혀 상관이 없었거나. 착각했는지 모른다. 연쇄살인의 범인을 찾는다. 연쇄살인의 범인을 잡는다. 하지만 연쇄살인의 범인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른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연쇄살인마저 그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연쇄살인이라는 흥미로운 장치를 거쳐서 더 중요한 이야기의 주제로 다가간다. 그런데 그마저 너무 뻔해 보인다는 것이 문제다. 차우경도 아동학대의 피해자였다. 그리고 차우경의 상처와 고통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그것으로 좋은 것인가. 그런 결론으로도 충분한 것인가.
차우경이 범인이 아니라면 진범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모두가 아는 이름과 얼굴로. 그리고 모두가 차우경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사이 차우경을 방패막이로 태연히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 것이다. 누구일까? 차우경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들을 알고 있으며 분노와 증오와 같은 감정까지 함께 공유하고 있는 그 진짜 범인은? 차우경이 여자아이의 정체를 묻기 위해 어린 시절 친구를 찾는 동안 어쩌면 진짜 범인은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방치하고 돈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자격없는 엄마를 심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차우경이 참지 못하고 따귀를 때려버린 엄마를 교통사고로 위장해서 죽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과연 사고였을까? 또다른 연쇄살인이었을까?
벌써부터 뻔히 보이는 길이라 여겼었는데 어쩌면 막다른 길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생겨 버렸다. 이 길로 가면 분명 지름길인 것 같은데 어쩐지 더 멀리 빙빙 돌아 막다른 곳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아니면 이마저도 작가의 함정이거나. 실제 차우경이 범인인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차우경을 범인으로 여기는 자신을 불신하고 스스로 다른 함정으로 걸어들어가게 만든다.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게 너무 고약하다. 드라마를 보면서 작가의 얼굴까지 함께 볼 수 없다는 점이 포커보다 더 불리한 점이다. 어떤 표정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그 답이 정답이 맞는 것일까?
더 복잡한 사정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더 깊은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것 같다. 아직은 표면의 이야기로만 추측하고 추리한다. 증거 없는 추리란 단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경찰들이 열심히 뛰고 있다. 차우경을 의심하며 차우경의 주변까지 샅샅이 뒤지고 있다. 그들은 또한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될까.
정말 재미있다. 그냥 재미있다. 하여튼 재미있다. 매순간 눈을 떼지 못하겠다. 치밀하게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아주 작은 수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같다.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는지도 모르는. 흥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