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 실재와 허무, 감각과 인지와 착각의 현실
결국 현실이란 인지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감각을 통해 존재는 인식된다. 그러면 존재하기에 감각은 대상을 인지하는 것인가? 감각이 인지하기에 대상은 존재하는 것인가? 부처는 바로 그렇게 묻고 있었다. 과연 네가 감각을 통해 실재한다 여기고 있는 모든 것이 과연 실재하고 있는 것인가.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실제 칼에 베인 듯 고통스럽고 상처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것은 실제인가? 아니면 단지 환각에 지나지 않는가? 하지만 설사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당장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이상 실재하는 것처럼 반응할 수밖에 없다. 숨고 도망치고 피하고 포기하는 모든 과정들이 실제인 듯 절절하기까지 하다. 덕분에 시간을 건너뛰는 체험도 할 수 있었다. 벌써 끝인 건가?
차병준과 유진우의 짧은 스침은 현실에 존재하는 그런 착각과 망상의 허구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의심이 사실을 만든다. 그렇게 여기고 싶고 믿고 싶은 충동과 바람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낸다. 그렇지 않아도 경찰이 찾아와 의심을 들쑤실 때 유진우가 딱 의심하기 좋은 말을 차병준에게 건넨다. 미안하다. 뭐가? 왜? 어째서? 아들이 죽고 평소 아들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유진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충분히 의심을 뒷받침할 만하다. 김의성이 선역이라는 것이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차병준은 유진우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그동안의 그에 대한 인간적 신뢰와 애정을 지킬 수 있을까?
어쩌면 허무하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도. 하늘이 내렸다는 부모와 자식 관계도. 하물며 그저 오랜 친구사이야. 친구로부터 배신당하고, 아내와 이혼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한다. 그런 점에서 만난 지 고작 이틀만에 유진우에 대한 일방적인 호감을 드러내는 정희주 역시 그다지 믿음이 안가기는 마찬가지다. 쉽게 결혼하고 이제 다시 쉽게 헤어지려는 법적인 아내 고유라처럼. 실재하지 않음에도 자신을 죽이려 뒤쫓는 - 실제 죽일 수도 있는 게임처럼 실재하는 것 같은 관계들이 허구처럼 쉽게 깨져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게임이지 않았을까. 정세주가 그라나다와 같은 증강현실의 게임을 만든 것도, 유진우가 증강현실의 게임속이 갇혀 버린 것도. 실제의 차형석과 단지 게임속 데이터에 불과한 차형석이 구분되지 않는다.
결국은 진짜를 찾는 과정인지 모르겠다. 허구와 실재가 공존하는 가운데, 단지 게임의 데이터와 실재하는 존재 가운데서 자신에게 진짜가 무엇인가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정희주가 게임속 데이터인 차형석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다. 하지만 그런 우연하고 갑작스러운 상황들에 무슨 실재하는 의미가 있겠는가.
그냥 병실 문을 사이에 두고 게임속 데이터가 되어 쫓아온 차형석과 대치하는 장면만으로 시간을 건너뛰고 있었다. 어쩌면 상투적이겠지만 3초를 남기고 우연히 병실을 잘못 찾아온 사람에 의해 대치는 깨지고 다시 싸움과 추격이 시작된다. 병실에 입원한 상태에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임설계가 잘못되었다. 다리를 다쳤어도 몸이 둔하고 느려도 플레이하는데 지장이 없어야 모두가 거리낌없이 즐길 수 있다.
그럼에도 과연 차형석을 죽인 것은 유진우 자신인가? 너무나 현실같은 게임으로 인해 게임속 죽음이 실제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인가? 그러면 정세주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무엇보다 게임의 서버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서버 자체를 멈춰 버릴 수는 없을까? 아니면 유진우의 말처럼 벌써 미쳐서 게임과 상관없이 게임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이혼을 다투는 아내 고유라가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역다운 존재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차병준에게도 결코 기죽지 않는다. 차병준마저 어느새 유진우에 대해 오해하게 되려는 듯하다. 차형석이 죽이려 쫓아오는 게임속이나,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인간관계나. 출가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구원은 있을 것인가. 아마도.